FUN OF SOUND
소리 내어 읽기의 매력을 짚어봅니다
소리 내어 읽는 기쁨, 낭독
글. 한재훈(연세대학교 연구교수)
눈으로 읽기와 소리 내어 읽기는 큰 차이가 있다. 최근 아이들에게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소리 내어 읽는 인문 공부 모임이 늘고 있는 추세다. 글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 내어 읽기의 매력에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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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朗讀)’의 사전적 정의는 ‘소리를 내어 읽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문으로 ‘선언문 낭독’ ‘추모사 낭독’ ‘발표문 낭독’등을 들고 있다. 이 예문대로라면 낭독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문건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낭독에 대한 이해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오해다. 낭독이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든 혼자든 상관없이 또 그 글의 성격이 공적이냐 사적이냐에 관계없이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우리의 독서법은 전통적으로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었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해 보자. 단원 김홍도의 <서당도>에 등장할 법한 자그마한 서당이 있다. 그곳에 여러 명의 학동들이 모여 글을 읽는다. 해질녘 훈장님 앞에서 배송(背誦)을 잘해 회초리를 맞지 않으려고 다들 열심히 읽고 있다. 서산(書算)을 옆에 두고 글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읽은 횟수를 헤아리며 일일백독(一日百讀)을 향해 좌우로 몸을 흔들며 읽는다. 혹여나 내 목소리가 다른 학동의 소리에 묻힐까 서로 목청을 돋우며 소리 내어 읽는다.
또 다른 장면 하나를 상상해보자.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두꺼운 돋보기를 콧잔등에 걸치고 책을 읽고 계신다. 그런데 어르신은 책의 내용을 연신 중얼중얼거리며 읽고 계신다. 그 중얼거림에는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떤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 리듬에 맞춰 어르신의 몸도 흔들흔들 리듬을 탄다. 어떤 글이든 중얼중얼거리며 읽는 어르신이 계시다면 그분은 십중팔구 어렸을 때 서당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분일 것이다.
서당, 서원, 향교, 성균관 등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낭독이 독서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제자들에게 “글을 읽을 때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마음을 수습한 다음 소리 내어 읽으라”고 가르쳤다. 율곡 이이(1537~1584)는 만년에 위장병으로 고생한 탓에 소리 내어 글을 읽지 못했지만 마음에 와 닿는 대목에서는 몹시 기뻐하며 낭독을 했다고 전해진다.
남계 박세채(1631~1695) 역시 문회서원(文會書院)의 원규(院規)를 제정하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소리 내어 읽기”를 독서법으로 원생들에게 제시했다. 이밖에도 낭독을 권하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전통은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회암 주희(1130~1200)의 독서삼도(讀書三到)에서 이미 발견된다. 독서삼도란 독서를 할 때 나의 세 가지가 그 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나의 마음이 도달해야 한다는 뜻의 심도(心到)로, 나의 생각과 정신을 분산시키지 말고 그 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의 눈이 도달해야 한다는 뜻의 안도眼到인데, 글을 허투루 보지 말고 문맥과 문리를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나의 입이 도달해야 한다는 뜻의 구도(口到)로서, 처음 접한 그 글이 입에 올라 익숙해질 정도로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독은 이 삼도(三到)를 한꺼번에 하는 종합적인 독서법이다. 언뜻 생각하면 소리 내어 읽기인 낭독은 입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 세 가지 중 구도에 해당할 것처럼 보이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정신을 집중시키는 심도와 문맥과 문리를 찾아가는 안도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낭독은 그저 소리만 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읽는 글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속내를 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독서법이라 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낭독을 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만성낭독(曼聲朗讀)’이다. 만성이란 목소리를 길게 뽑아 느릿하게 발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글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능한 길게 가짐으로써 그 글이 담고 있는 뜻과 결을 음미 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격절낭독(擊節朗讀)’이라는 더욱 흥미로운 낭독법이 있다. 격절이란 원래 음악용어로서 장단이나 박자를 맞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격절낭독은 그 글이 주는 맛을 느끼게 되면서 저절로 신명이 나서 장단이나 박자를 맞추게 되는 낭독법을 가리킨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마도 음식으로부터 영양소를 섭취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우리가 음식을 먹는 이유의 전부일까? 만일 몸에 필요한 영양소들을 골고루 담아 정제한 알약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게 될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과는 별개로, 음식의 맛을 느끼는 과정 자체 역시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궁극적으로는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목적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독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글에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맛이 있다.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음식을 먹는 행복감이 있듯, 글쓴이의 솜씨가 빚어낸 글을 읽는 행복감이 있다. 더구나 깊은 맛을 담고 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먹는 이도 찬찬히 음미하면서 먹어야 하듯,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글을 읽을 때 역시 읽는 이가 섬세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길게 뽑아 느릿하게 발성된 목소리로 가능한 글과 마주하는 시간을 길게 갖고, 이를 통해 그 글의 결을 더듬고 뜻에 다가가고자 하는 태도. 그 글의 맛을 음미함으로써 어느 순간 그 글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신명이 나서 장단과 박자를 맞추며 글을 읽고 있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낭독의 최고 경지가 아닐까? 그래서 옛 사람들은 낭독의 기쁨을 “정신이 맑아지고 유쾌해진다”는 뜻의 ‘제호관정(醍醐灌頂)’이나 “이와 뺨 사이에 향기가 난다”는 ‘치협형(齒頰馨)’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또한 낭독은 읽는 사람뿐 아니라 이를 듣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해준다고 옛 사람들은 여겼다. 그래서 조준구(1636~1697)라는 선비는 자식들의 글 읽는 소리를 “우리 집의 음악”이라했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맑은 소리’로 ‘눈 덮인 깊은 산속 글읽는 소리’를 꼽았을 정도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아름다운 낭독의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낭독의 전통 속에서 독서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독서에는 소리가 제거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은 ‘소리내어 읽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배웠다. 어른들 중에도 이제는 몸을 흔들면서 중얼중얼 책을 읽는 분을 만나기 쉽지 않다. 이렇게 우리의 독서는 부지불식간에 낭독이 아닌 묵독(默讀)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혼자 열 번 읽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읽는 것에서 다양한 의미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낭독의 힘이다.
낭독과 묵독의 차이는 글을 소리 내어 읽느냐와 눈으로만 보느냐의 차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글을 소리 내어 읽게 되면 그 글의 의미와 소통하면서 갖게 되는 흥취의 정도가 소리에 묻어 나기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한 사람이 같은 내용의 글을 같은 자리에서 읽더라도 그 글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다르다면 낭독의 소리는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낭독에는 그 글의 내용이 나의 생각으로 용해되고 나의 삶 속에 체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에 비해 글을 눈으로만 보는 묵독은 그 글 속에 수록된 정보를 가능한 빨리 스캔해서 머릿속에 저장하고 이를 지식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읽어야 할 글의 성격에 따라 묵독을 통해 얼른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 공감하고 그 속에서 함영(涵泳)해야 하는 글들까지 묵독을 당연시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래를 대할 때 가사만 묵독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락에 맞춰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이유는 가사와 곡조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우리의 정감을 표현하고 치유와 정화의 계기를 맞기 위함이다. 낭독 역시 이런 이유에서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다.
낭독은 읽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훌륭한 독서법이다. 같은 글을 놓고 누군가가 읽고 누군가는 듣는다. 그때 읽는 이는 글의 내용에서 얻는 것도 있겠지만 듣는 이의 반응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되는 것들이 있다. 듣는 이 역시 읽는 이가 소리를 통해 표현하는 느낌에 참여하면서 혼자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문자의 의미가 소리로 전달되면서 그 감흥이 더 깊어진다.
글 한재훈
한재훈은 입학 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시골로 내려가 서당에서 15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려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