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OF HUMANITIES
동서고금의 문학과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폭넓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인문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도시
바르셀로나
글. 신진호(시인) 사진 제공. 스페인 관광공사
그곳에 도시가 있다. 그곳에 사람이 있고 그곳에 사랑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랑을 꿈꾼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감성적으로
변하는 도시, 아무리 염세적인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도시.
바르셀로나는 열려있는 책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골목과 광장으로 흩어져서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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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블라스(Ramblas)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의 유일한 길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아버지가 처음 나를 데리고 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 1945년 초여름, 아버지와 나는 잿빛 하늘 아래로 밀려오던 새벽안개에 굴절된 태양빛이 구릿 빛 꽃봉오리처럼 흩어지던 람블라 데 산타모니카(Rambla de Santa Monica) 길을 걷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출신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Carlos RuisZafon)의 베스트셀러 『바람의 그림자』 첫 부분에 묘사된 람블라스 길의 모습이다. 바르셀로나 구도심을 가로질러 항구까지 이르는 1.2km에 달하는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단순한 길 이상의 의미를 준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람블라스 길을 걸으며 자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던 길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이별의 쓸쓸함을 안고 가던 길이기도 했다. 관광객들에게도 람블라스 길은 특별하다. 누구라도 그 길을 걸으면 가슴이 뛰고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시인 로르카(Lorca)는 람블라스 길을 일컬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의 유일한 길’로 표현했을까. ‘물이 흐르는 도랑’이라는 뜻의 람블라스는 예전에는 물이 흘렀던 성 밖의 도랑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물 대신 일 년 내내 사람의 물결이 흐른다. 람블라스 길에는 문인, 예술가, 소매치기, 야바위꾼, 창녀, 경찰관, 그리고 관광객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다. 람블라스 길은 바르셀로나의 정수에 가장 닿아있는 길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바르셀로나 구도심을 가로질러 항구까지 이르는 람블라스 길
문화가 모이는 곳, 라발(Raval) 지구
라발(Raval) 지구는 바다를 향해 서서 람블라스 길 오른쪽에 있는 지역이다. 산업혁명의 물결에 따라 급조된 공장들이 들어섰던 곳이고,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의 값싼 주거지가 있었던 지역이다.
라발 지구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총 거주민의 50% 정도가 파키스탄, 모로코 등 외국 이민자들이다. 조류가 모이는 곳에 플랑크톤이 풍부하듯이 여러 인종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그 문화적 다양성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 문화의 자양분을 먹기 위해 수많은 ‘인문의 물고기’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들은 라발의 좁은 골목과 어두운 광장으로 스며들어가 문학과 예술로 토해냈다. 왜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밝고 환한곳보다는 좁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것일까. 라발 지구 한복판, 거리의 여자들이 등을 대고 있는 좁고 어두운 골목의 불과 몇 미터 지점에 1820년에 문을 연 바르(Bar) 마르세야(Marcella)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무릇 예술가나 문인들은 창작으로 인해 빠져나가는 일종의 ‘공허감’을 무엇인가로 채워야 하는 법인데 바르마르세야는 ‘채우기’에 딱 좋은 곳인 듯하다.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오래된 바르 마르세야에서 피카소, 달리, 그리고 헤밍웨이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 문인들이 앉았던 테이블에 앉아보자. 그리고 그들이 마셨던 압센트(Absente)를 마셔보자. 어쩌면 피카소, 달리, 그리고 헤밍웨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으리라
고딕(Gotic) 지구, 인문적 상상력의 원천
바다를 향해 서서 람블라스 길 왼쪽에 있는 고딕 지구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다. 고딕 지구란 명칭은 중세 고딕양식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는 유럽에서도 중세의 분위기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인문적인 상상력의 원천이 되곤 했다.
피카소 벽화가 있는 대성당 광장에서 성벽 사이의 좁은 비스베(Bisbe) 길로 들어서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모든 것이 정지화면 속에 갇혀 버린다. 색채가 사라진 흑백의 좁고 어두운 골목을 유영하듯이 걸으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거리 음악가가 부르는 서정적인 선율의 아리아나 바이올린 연주곡은 좁은 골목의 울림으로 인해 더욱 아름답다.
비스베 길 옆의 산 펠립 네리 광장(Plaza de San Felip Neri)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1938년 1월 30일 아침 9시, 프랑코와 연합한 이탈리아 공군기들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마흔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그중 대부분은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었는데 그런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시청에서는 그 참극을 잊지 않기 위해 건물 외벽에 생긴 파편 흔적을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그 비극의 현장이 지금은 광장에 붙어있는 산 펠립 네리 초등학교의 휴식시간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다. 처참한 죽음이 있었던 곳이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한 것이 좀 묘하다.
산 펠립 네리 광장은 그 묘한 분위기 탓에 여러 작품들의 배경으로 사용되곤 했다. 1985년에 발매된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 그르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그리고 미국 그룹 에반에센스(Evanescence)가 부른 서정적인 음악 마이 임모탈(May Immortal)의 뮤직 비디오 촬영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이나 영화 지망생들의 촬영 장소로 흔히사용되기도 한다.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고딕 지구에는 시대를 관통해 왔던 고민들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고, 밤을 지새우면서 토론했던 지성의 흔적들이 종유석처럼 쌓여있는 곳이다.
자연을 닮고자 하는 건축가 가우디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만 있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 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한 건축가가 도시의 색깔을 바꿔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바르셀로나에서만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실용주의적인 건축가, 자신이 태어난 카탈루냐(Catalunya)를 너무나 끔찍이 사랑해서 프랑코가 집권했던 기간에는 철저히 버림받았던 지역주의적인 건축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건축과 종교만을 생각했으면서도 꿈틀거리는 관능을 보여주었던 모더니즘 건축가 가우디. 가우디가 하늘에서 툭 떨어진 건축가가 아니라면 그의 건축물들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카탈루냐 자연과 인문의 결정체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1883년에 공사에 참여하여 1926년 그가 죽을 때가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는 가우디 건축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품었던 카탈루냐의 자연이 온전히 녹아있는, 어찌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모양의 성당 앞에서 우리는 가우디 건축의 자유분방함을 본다. 그리고 가우디가 보여준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건축 세계에 못지않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시대를 앞서간 ‘받아들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가우디는 가난한 건축가일 뿐이었고 가우디를 키우고 포용해준 것은 카탈루냐, 그중에서도 바르셀로나 사람들이었다.
자유분방하지만 질서정연하기도 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
카사 밀라(Casa Mila.) 우리말로 ‘밀라의 집’이라고 불리는이 건축물 역시 가우디의 끝없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 외벽은 지중해 백사장에 밀려오는 물결과, 그 물결에 일렁이는 미역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카사 밀라에서 가우디의 상상력은 건물의 외벽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건축물로는 믿기 어렵게 가변 벽체 시스템이 적용되어 입주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벽을 옮길 수 있게 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가우디의 상상력은 구웰 공원(Guell Parc)에서도 만날 수 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 법한 과자로 만든 모양의 집이 있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밤이 되면 뱀처럼 길게 휘어진,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를 타고 날아다닐 것 같은 물 뱉는 도마뱀도 있다.
바르셀로나엔 가우디의 건축물 외에도 피카소 미술관등 예술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런 인문학적 요소 때문일까? 헤밍웨이와 피카소 가우디와 달리가 즐겨 찾았다는 200년된 바르 마르세야에는 저녁이면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붐빈다.
스페인의 개성 있는 패션 브랜드 데이스구알 본사가 바르셀로나에 있다.
데스이구알(Desigual), 나는 너희들이랑 달라
자라에 버금가는 스페인 의류 브랜드 데스이구알. 우리말로 ‘나는 너희들이랑 달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르셀로나에는 데스이구알의 본사가 있다.
검은색 바탕에 진노랑색으로 된 택시의 색깔은 분명다른 도시의 택시 색깔과는 다르다. 바르셀로나의 쓰레기통보다 더 실용적이고 예쁘기까지 한 쓰레기통을 나는 본적이 없다. 바르셀로나의 벤치들도 특별하다.
양도 특별하지만 벤치가 놓인 방향이 더 특별하다.
같은 장소에 있는 벤치라도 놓여있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을 시민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격자형으로 도시를 설계하고 그 위에 사선으로 된 길을 만드는 사람들. 다이빙장을 실외에, 그것도 산중턱에 건설한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은 왜 이 도시가 인문적인 상상으로 가득찬 도시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지중해를 지배했던 중세, 그리고 산업혁명의 역동성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르셀로나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저변에는 언제나 인문적인 상상으로 가득했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드러나듯 헤밍웨이가 스페인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인문학적 에너지였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은 밝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따스함을 준다.’
바르셀로나는 찍고 가는 점點의 도시가 아니라 와서 흠뻑 적시고 가야 할 면(面)의 도시다.
글 김경집
신진호는 BCNSolution(www.bcnsolution.co.kr)를 통해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문화,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컨설팅 및 이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