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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AUTUMN

SCENE OF SOUND
타인의 슬픔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는 고전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제각각 다른 나를 우리로 묶다

슬픔을 공유하는 그리스 비극,

글. 함돈균(문학평론가) 그림. 김남희

우리는 소통하려 애쓰지만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로 인해 관계의 불협화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슬픔을 공유할 때만은 갈등의 벽을 허물고 타인과 참되게 만날 수 있다. 우린 때론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있는 예술이다.
서양문학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그리스 비극의 근원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흐르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학비평서 중 하나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이 책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시’에 관한 책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는 인간의 음성으로 노래되고 문자로 쓰이고 전승되는 포괄적인 문학 형식 전반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지금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문학에 대한 가장 고전적 개념 규정이 시도된 문학교과서인 이 책에서 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비극(tragoedia)’이다. 이 ‘인문주의자’에게 문학의 본령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가장 중요한 모델이 비극이었다는 뜻이다.
그리스 고전비극은 서양문학의 원류다. 지금까지도 서양문학에서 매우 중요하고 근원적 지위에 있는 것이 연극인데, 이는 서양문학 최고 반열에 있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나 괴테, 브레히트, 체홉 같은 작가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른 장르를 겸업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바로 희곡이었다. 이는 현대 이전 동양사회에서 연극이 고급문학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연극배우가 ‘광대’로 불리며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이며 천민이었던 점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지점이다.

에우리페데스의 비극 작품 <엘렉트라> 공연 장면

그리스 고전비극은 단지 문학사에 한정된 장르가 아니다. 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철학을 독자적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그리스 고전비극을 자기방식으로 해석하는 일을 자기 철학의 필수적인 과제로 삼았다. 헤겔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프로이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키에르케고르는 아이스퀼러스의 『아가멤논』을 철학적 탐구대상으로 삼았다. 청년 니체는 아예 자신의 사상 자체를 그리스 고전비극의 음악정신을 바탕으로 ‘디오니소스 사상’이라고 명명하였다. 서양의 엄청난 현인들은 도대체 왜 그리스 고전비극을 그들 사상의 화두로 삼았을까.
이들이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사고가 사실상 오늘날 서양사고의 핵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리스 고전비극을 서양정신의 정수와 서구적 현대성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고전’이란 말이 단지 ‘옛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 개인과 사회,감성과 이성의 갈등과 같은 ‘보편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에 출현하였음에도 지속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그리스 비극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흐르고 있다.

Ernest Hilemacher의 <테베를 떠도는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1843년>

어떻게 그리스 비극을 읽을까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 염두에 둘 사항은 첫째, 이 드라마들이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시인(극작가)의 시각에 의해 다시 해석된 ‘사람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에는 ‘신’이나 ‘신탁’ ‘운명’ 등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들이 대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하더라도, 핵심이 상대적으로 거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신의 지배와 운명의 속박으로 이해되고 있는 전승된 세계 이해 이면에 존재하는 유한성에 관한 인간적 방식의 재해석이다. 세계의 신비와 부조리를 ‘운명’이나 ‘신탁’ 등의 단어로 언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표면에 불과하며 극작가는 실은 비극을 통해 인간의 행위나 생각에서 빚어질 수 있는 오류와 실수, 약점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전승된 오이디푸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야기의 재해석과 재창조를 통해 신탁(운명)에 맞서는 인간적 의지와 세상의 부조리 이면의 인간적 오만(hubris)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은 대중을 위한 디오니소스 축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상연된 비극 경연대회의 대본으로 만들어졌다. 주목할 점은 디오니소스 신이 지닌 특이한 성격이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주신들 중에 올림푸스 신전에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신이다. 디오니소스 신은 그리스 신들 중에 가장 나중에 태어난 신이며, 이는 디오니소스 신이 인류학적 차원에서 볼 때 다른 곳으로부터 유입된 ‘외래 신’이었을 거라는 점을 추측하게 한다. 외래의 이국적 신으로서 디오니소스 신은 포도의 신인 동시에, 그림에서는 동방의 맹수들을 대동하고 있기도 하며, 반인반수의 술 취한 스승 실레노스와 함께 등장하곤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주신인 아폴론 신과 달리 빛과 이성의 이면을 상징하는 신이다. 비극의 인간·세계 탐구가 삶의 밝은 면, 합리적·지성적 이해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비극의 신이 디오니소스라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다.
또한 비극의 전성기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문화의 총체적 전성기와 시기적으로 겹치며, 이때 비극 경연대회가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국가행사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디오니소스 축제가 농촌 중심의 축제였던 데 반해, 그리스 비극 경연대회가 시작된 것은 아테네의 정치가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한 것으로,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도시국가의 축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국가 문화의 정점기에 인류 역사상 탁월하게 진보적인 정치체제였던 ‘민주주의’라고 하는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발명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비극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올림푸스 신전에 사는 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 신이 지닌 계급적 성격이 ‘평민’ 또는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하나의 고귀한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이 아우르는 공유를 끌어냈고, 이는 도시국가의 축제로 전환된 그리스 비극이 민주주의 체제 시민교육의 장이자 놀이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민주주의란 타고난 운명과 신들의 뜻을 수락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삶을 능동적으로 따져 묻고 토론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삶의 부조리에 관한 비극의 심원한 통찰은 시민교육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니소스 극장.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고대 아테네의 극장으로서 드라마 예술의 근원지이다.

슬픔과 공포에 관하여
전통적 신화와는 다른 삶에 대한 이런 심원한 통찰과 능동적 자기반성에서 솟아나오는 비극적 정서가 바로 ‘슬픔/연민(eleos)’과 ‘공포(phobos)’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한 그리스 비극의 이 본질적 특징은 단순히 한 등장인물의 정서적 상태나 청중의 정 서적 반응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과 세계탐구의 결과다. 예컨대 전승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신탁, 즉 운명의 문제다. 한 가문에 내려진 신의 저주가 있고, 한 인간이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운명은 신이 정해놓은 대로 결국 완성된다. 신화를 듣고서 우리는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세계의 불가사의에 체념하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수락하게 된다. 이게 신화적 세계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 운명 서사를 인간의 의지에 관한 서사,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인간탐구의 드라마로 초점을 바꿔 놓는다. 『오이디푸스 왕』 드라마는 ‘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너를 죽이고, 네 아내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점지 받는 오이디푸스의 선친 라이오스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고, 이미 산전수전 인생역정을 다 겪고 난 늙은 왕 오이디푸스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사를 사건발생 순서와 다르게 역시간적으로 구성하면서,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을 추적해 가는 오이디푸스의 탐정 드라마로 바뀐다.
이러한 구성은 인간적 시점(point of view)이 지닌 유한성을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이 유한성 안에서 자기 확신, 즉 인간적 오만에 갇힌 지혜로운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부정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괴물성’을 증명하는지를 보여준다. 청중은 지혜로운 인간이 끔찍한 죄를 지은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를 연민하게 되며, 그 연민의 상황이 내게도 해당될 수 있는 보편적 진실이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그리스 비극의 비극성, 즉 비극이 산출하는 ‘슬픔’과 ‘공포’에 대한 성찰은 인간성과 세계에 대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가장 깊은 통찰 중 하나다. 비극의 인물형을 ‘캐릭터(character)’라고 부르는데, 이는 ‘동전에 새겨진 사람 얼굴’을 뜻하는 말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동전처럼 동종의 존재 위에 약간 다른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비극의 비극성을 인간성 전체에 대한 탐구라 생각했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탐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타인을 한층 더 가까이 여기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모두 함께 행복한 길을 모색하게 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테네 모나스티라키 광장

글 함돈균

함돈균은 문학평론가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문학과 인문고전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사물의 철학』『얼굴 없는 노래』 『예외들』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