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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AUTUMN

FUN OF SHARING
배움의 터, 세계의 이색적인 놀이터를 살펴봅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배운다

글. 서윤영(건축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세계의 놀이터 디자인(한즈미디어)」

영어로 놀이터는 '플레이그라운드 (playground)'이다. 놀이 전문가들은 ‘play’보다 ‘ground’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놀이 시설보다 함께 놀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 아이들은 놀 것이 없을 때 새로운 놀이를 창조한다. 위험을 넘어서 보기도 하고, 창조적으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배움의 터, 놀이터의 의미를 조명해본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헌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구입했다.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책『팔 거리의 아이들』이었다. 헝가리의 극작가 몰나르 페렌츠의 작품으로 동네의 작은 공터를 차지하기 위해 팔 거리의 아이들과 길 건너편의 붉은 셔츠의 소년단이 다투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공터는 잃어버린 조국 헝가리를 은유하지만,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책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두세 번 반복해 읽었고, 어느새 우리 동네에 있던 공터를 생각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고작 공터 하나를 두고 패거리로 나뉘어 다투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공터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놀이터였다. 요즘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미끄럼틀에 시소에 그네에 철봉이 있는 것이,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로 이루어진 전국의 아파트들이 거기에서 거기인 것처럼 똑같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공간은 오히려 상상력의 폭이 좁아지게 된다.
빈 방에 책상이 놓여 있으면 공부방이 되고 침대가 놓여 있으면 침실이 된다. 그곳에 어떤 가구가 놓임으로써 그곳에서 일어나는 행위와 성격이 규정되어지는데, 놀이터 역시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상상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건축은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그릇은 되도록 깨끗이 비워져야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방석 세 개만 놓여 있어도 그것은 기차가 되어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 더 많이 발현되게 하기 위해 해외에서는 여러 다양한 놀이터들이 디자인되고 있다.
동물이 되어 볼 수 있는 놀이터
독일의 부퍼탈 동물원 내에 마련된 놀이터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서식환경을 재현하여 만든 호랑이 숲 놀이터이다. 호랑이 우리 근처에 마련된 이곳은 1.5~2미터 정도의 나무 막대들을 촘촘히 꽂아 호랑이 숲을 재현하였고, 또한 나무 호랑이 다섯 마리를 곳곳에 숨겨 놓아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스페인 알코벤다스의 갈리시아 공원에 있는 놀이터의 주제는 개미굴이다. 개미가 흙 속에 땅을 파서 집을 짓는 점에 착안하여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한 개미굴의 모습으로 꾸몄고 입구에는 전체 모습을 그려놓은 지도가 있어 아이들은 마치 개미가 된 듯이 다양한 길을 걸어 다닐 수 있다. 호랑이 숲에 들어가 보고 개미굴에 들어가면서 아이들은 직접 호랑이가 되거나 개미가 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좀 더 몸을 많이 쓰는 활동적인 놀이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암스테르담의 미어파르크공원 내의 놀이터는 작은 언덕을 이용해 두 가지 유형의 놀이시설을 통합하여 만들었다. 언덕의 한쪽에는 미끄럼틀, 터널, 모험놀이 등 기존의 놀이시설을 배치하고, 건너편에는 다양한 난이도가 있는 3.5미터 높이의 인공암벽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타거나 암벽등반을 하는 등 신체의 발달 정도에 맞는 더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멜리스 스토크파르크 공원 놀이터는 일반아동과 장애아동이 함께 놀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혼자 열 번 읽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읽는 것에서 다양한 의미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낭독의 힘이다.

도전을 자극하는 놀이터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어린 시절 계단을 두칸 세 칸씩 한꺼번에 올라간다거나 혹은 계단 난간을 타고 미끄러지는 등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는 아이들은 어제보다 오늘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고 그래서 때로는 위험해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 도전의 과정이 곧 성장의 과정이다. 이 점을 살린 놀이터로, 시각이나 청각,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각 발달단계를 설정해 놀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원형 경기장 형태로 설계된 놀이터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미끄럼틀이 있고 사다리가 있다. 기어오를 수 있는 수직의 나무벽과 가파른 경사가 있으며 또한 안쪽에는 앉아서 놀 수 있는 오붓한 공간이 있어, 신체 활동이 조금 어려운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까지 함께 놀 수 있는 곳에서 자랐던 아이들은 이후 나와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하게 될 것이다.
한편 놀이터는 어린이들이 이용하는 시설인 만큼 몇 가지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우선 일정한 영역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공을 주우러 무작정 뛰어나갔다가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특히 성범죄자 등의 이력이 있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놀이터의 경계는 확실해야 한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부드러운 바닥재, 어린이의 신체적 특징에 맞춘 사다리와 계단, 경사로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놀이터에서는 활동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휴식공간을 두어야 하며 함께 따라온 부모나 보호자를 위한 공간도 마련해두면 좋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놀기, 즉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은 돌무더기나 모래더미만 보아도 그곳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나무로 만든 자동차, 기차, 집 등은 더 이상의 상상력이 발휘되기 어렵다. 되도록 깨끗이 비워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공터 하나를 그들의 왕국이라 생각하며 서로 뺏고 지키는 공성전을 치룬 『팔 거리의 아이들』처럼, 그리고 그 책에서 읽은 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를 보며 상상력을 펼쳤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성장해갈 것이다. 팔 거리의 공터는 부동산업자에게 팔려 3층집이 들어섰고, 우리 동네의 공터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커다란 은행이 들어섰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나는, 그 은행에 나의 첫 대학등록금을 내었으며 얼마 전에는 그곳에서 대출을 받아 생애 첫 집을 샀다. 어쩌면 그 공터에서 나는 꿈을 키워 갔는지도 모르겠다.

요스페인 알코벤다스의 갈리시아 공원에 있는 개미굴 놀이터

프랑스 파리의 벨빌 공원 내부에 있는 놀이터

독일의 부퍼탈 동물원 내에 마련된 놀이터

암스테르담 미어파르크 내에 있는 놀이터

글 서윤영

서윤영은 건축칼럼니스트다. 홍익대학교, 인하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사람을 닮은집, 세상을 담은 집』 『꿈의 집, 현실의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