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spirit
故 청남 문태식 명예회장 1주기 추모식
올곧은 인생,
숭고한 정신을 아로새기다
글. 김희선 사진 제공. 아주 일러스트. 임성구
2014년 타계한 문태식 아주 명예회장의 1주기 추모식이 12월 24일 서울
서초구 청남빌딩 본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문규영 아주 회장을
비롯해 유가족 30여 명과 아주, 신아주, AJ 가족의 임직원 그리고 관계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 고인을 기리는 묵념으로 시작한 추모식은 추모 연주와
추모 영상 상영, 약력 보고, 추모사 낭독, 고인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법요 의식, 헌화 및 분향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 중 추모 연주와 추모
영상 상영은 모든 이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왔다. 고인이 살아생전에
즐겨 듣던 ‘신라의 달밤’이 잔잔하게 울려 퍼진 데 이어 고(故) 문태식
명예회장의 옛 모습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이 끝난
뒤 아주산업 이경언 기획본부장과 박재용 파일사업부문장은 각각 고인의
약력과 추모사를 낭독했다. 약력 보고를 통해 되돌아본 문태식 명예회장의
생애는 열정과 도전으로 점철된 인생 그 자체였다.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선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판단한 문태식 명예회장은 학구열을
불태워 대학까지 진학했다(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사학과).
1950년대 시멘트 사업을 시작해 콘크리트 전신주 공장을 설립하고
1980년 레미콘 사업을 본격화한 모습에선 천생 기업가다운 혜안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아주가 지금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문태식
명예회장의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앞서 개척한다’는 도전 정신에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 자리였다. 박재용 파일사업부문장은 추모사를 통해 문태식
명예회장의 개척자 정신, 윤리경영, 사회공헌활동 등의 업적을 되짚었다.
그는 “문태식 명예회장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년이 되었지만, 살아생전의
활력 넘치던 모습과 온화한 미소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서
“명예회장의 헌신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아주 임직원 모두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힘차게 도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추모객들이 헌화를
마친 뒤에는 장남인 문규영 회장이 유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전했다.
유가족 대표 인사를 하고 있는 아주 문규영 회장
“사랑으로 기업을 키우고 구성원들의 행복한 꿈을 실행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문태식 명예회장의 고귀한 뜻에 모두가 함께해줄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추모식을 마친 유가족과 임직원들은 현장에 전시해 놓은 유품과
고인의 행적을 담은 사진을 둘러보며 문태식 명예회장의 열정적인 생애와
소박한 삶을 추억했다. 고인의 친필 메모와 안경 등을 전시한 공간은
고인의 책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부인
백용기 여사와 유족은 고인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듯 유품과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경기도 남양주로 선영 참배를 떠나기 전 1층
로비에서는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1주기 추모식에 맞춰 제작된 문태식
명예회장의 흉상은 2015년 4월 29일 제작 계획을 수립한 이후 약 7개월
동안의 작업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흉상 제작은 정대현 서울시립대
교수가 맡았고, 흉상에 새겨진 명판 글씨는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강병인 대표가 참여했다. 제작한 흉상은 대한민국 산업의 개척자인 문태식
명예회장의 숭고한 기업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초동 청남빌딩, 상봉동
신아주, 문정동 AJ가족 사옥 로비에 각각 놓이게 된다.
숭고한 기업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문태식 명예회장의 흉상
아주 좋은 세상을 꿈꾸던 기부 영웅
문태식 명예회장은 살아생전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며
지역사회 발전과 인재 육성에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인은 2013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
가 선정한 ‘48명의 기부 영웅들’에 이름을 올렸고, ‘2005 자랑스러운 동국인상’과 ‘2002 동국청우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문태식 명예회장은 지난 2013년 토지 14필지
26만 3,799㎡(임야 1필지 26만 1,494㎡, 도로 13필지 2,305㎡)의
사재를 서울 중랑구에 기부했다. ‘어렵고 힘든 시기였던 1960년대에
중랑구에서 사업을 시작해 아주가 현재의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지역사회에 보답하고 싶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
고인이 기부한 토지는 시가로 400억 원이 넘는다. 개인이
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에 토지를 기부한 사례는 많지만 회사
창업주가 현금이 아닌 수백억 원대의 땅을 기부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중랑구는 문태식 명예회장으로부터 기부받은 일부 토지를
공원으로 조성해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여기에, 기부
토지 중 일부가 현재 건설 중인 구리~포천 고속도로 부지로 편입돼
받은 약 76억 원 상당의 토지보상비 또한 중랑구 장학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신천했던 이 시대의 큰 어른
문태식 명예회장. 그는 남이 가지 않으려던 힘든 길을 솔선해 걸었던
개척자이자, 국가와 사회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먼저 지녔던
진정한 사업가였다.
문태식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이 행한 작은 선행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중랑구에 땅을 기부하면서도
그 사실을 일체 알리지 않았다. ‘기업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소명을 묵묵히 이행하면서 사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기업가의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세상에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중랑구청이 구내 ‘빅뉴스’로 지역매체를 통해 알린 후부터다.
윤리경영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문태식 명예회장은 아주
임직원은 물론 기업가들의 귀감이 되어 왔다. 따라서 아주 계열사들은
명예회장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장학 사업과 사회공헌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문태식 명예회장은 자신에겐 누구보다 엄격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했다. 그와 동시에 인간적인 정을 매우 중요시했다. 자식들에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꿈을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성실하게 나아가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사업가로서의 열정이 곧 가족과 직원
그리고 사회를 향한 온정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온정 어린 마음으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문태식 명예회장. 고인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문태식 명예회장과 아주의 에피소드
농기구 자루 사업으로 사업가적 자질을 키우다 1928년 문태식 명예회장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념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청년 시절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농기구
자루 사업으로 사업가적 자질을 키워, 훗날 국가 산업 재건에 이바지할 다양한 사업을 극대화한 참
기업인이 된다. ‘세계적 기업’이라는 미래상을 담보한 아주와 그의 개척자 정신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부국을 꿈꾸던 청년 시절로부터 시작되었다.
목탄차 물류 사업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다 1949년 문태식 명예회장은 가진 돈을 전부 모아 목탄차를
구매했다. 당시 목탄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상당한 기술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임금이 높았다. 하지만
트럭에 대한 이렇다 할 지식이 없었던 상황에서 사기를 당했고 가세마저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문태식
명예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돈을 모아 시멘트 수입 대리점을 시작했다. 이 대리점이 바로 훗날
아주산업 창업의 모태가 된 ‘아주시멘트산업상사’다.
짜장면으로 명예회장과의 추억을 떠올리다 추모식 당일, 임직원들은 명예회장께서 즐겨 드시던 음식을 함께 나누며 그 분의 삶을 다시 한 번 추모하고 되돌아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인생도처유청산”“살다 보면 언제나 어려움은 있으나, 노력해 어려움을 극복하면 청산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신 명예회장의 사명과 염원을 더욱 깊게 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직원 사랑과 사업보국을 몸소 실천해 온 문태식 명예회장의 시대정신이야말로 아주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문태식 명예회장의 생애
- 1928.02.07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출생
- 1941.02 서울 대창학원 졸업
- 1949.03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 1960.09 아주산업(주) 설립
- 1965.03 한국원심력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취임
- 1973.05 동국대학교 동문회 부회장 취임
- 1984 아주산업 회장 취임
- 2004 아주그룹 명예회장 취임
- 2014.12.26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