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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New Year

insight

금원 vs 나혜석

세상에 대한 호기심 방랑 DNA

글. 박우찬 그림. 민지홍

여성이 욕망이 있다는 것조차도 숨겨야 했던 시절,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두 여성이 있다. 담장 너머 저 바깥 세상을 궁금해한 금원과 나혜석. 시대를 앞서간 이 두 여인은 자신의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서 남겼다.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갔던, 시대를 행군한 두 여성을 소개한다.
하늘이 내게 총명한 재주를 주셨으니
문명한 나라에서 어찌 쓸모 있게 쓰이지 않겠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배낭 메고 금강산을 유람한 최초의 여성 여행가 금원
금원(錦園 1817~? )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을 유람했고, 삼십 대가 되어서는 용산 삼호정에서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여성들만의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1850년에는 그동안의 여행기를 한문으로 기록한 책 『 호동서락기』를 썼다. 또한 중국의 역사와 신화, 한시를 능숙하게 인용할 정도로 한학에 정통했으며 당대 유명한 문장가들과도 교류한 실력자였다. 금원은 규방 탈출의 길을 여행에서 찾았다. 그녀의 여행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되어 봐야만 할 것이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불국(佛國)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신여성 나혜석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인이며 한국 근대사에서 진보적인 성향으로 특별했던 여성이다.
시대적 여권 주창의 선두주자였으며 선각적 시론과 시, 소설, 생활 에세이 등을 신문과 잡지에 게재했다. 한국인 화가로는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근대 최초의 본격적 전업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1927년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유럽 여행을 한 여성이 되었다
호기심과 용기, 그녀들의 삶을 움직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5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
- 김동환 作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시인의 한 구절처럼 어릴 적 ‘대체 저 산 너머에는 누가 살까? 그곳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하는 궁금함에 산을 넘고 넘었던 기억이 난다. 호기심이 나를 움직인 것이다.
먼 옛날,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류의 조상들은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식량 확보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커다란 동기였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들은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과정 중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과 마주쳤고, 곳곳에 삶과 문명의 족적을 남겼다. 노마딕한 삶은 인간의 유전자 속에 내재한 인간의 천성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이 궁금했던 두 명의 여인, 금원과 나혜석
이 땅에서 나고 자랐던 200여 년 전 금원과 100여 년 전 나혜석은 호기심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들은 여자의 몸임에도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도전했다. 금원은 여행은 고사하고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 후기 남장을 하고 금강산과 관동팔곡을 여행하고자 했다. 1830년 열네 살의 금원은 극구 반대하는 부모를 졸라 여행을 허락받았고 전국 곳곳을 여행했다. 금원의 여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현실과 세상의 운행 이치를 알기위함이었다. 1850년 금원은 20여 년에 걸친 자신의 여행기를 담아 『호동서락기』라는 기행문을 남겼고, 인생 후반기에는 용산 삼호정에 정착해 명문가 소실 5인의 여성으로 구성된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 시회(詩會)를 만들었다. 남성 중심적인 신분제 사회에서 여성들로 이루어진 시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금원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방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호동서락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었다. 여성의 존재 가치가 거의 없었던 시절, 그녀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호동서락기』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금원의 염원이자 절규였다.
1896년 금원과 비슷한 여성이 이 땅에 태어났는데, 나혜석이다. 나혜석의 진취적 기상은 마치 금원이 환생한 듯하다. 금원은 자유로운 여행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지만, 의식 개조, 사회 개혁이라는 곳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유교 사회의 신분적, 사회적 한계 때문이었겠지만 사회적 의식이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혜석의 활동은 개인적 자유를 넘어 정신 개혁, 의식주 개혁, 사회개조로까지 나아갔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여권운동가, 사회사상가, 소설가였다. 그녀가 하면 뭐든지 우리나라 최초였다. 1927년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나혜석에게 세계 일주의 기회가 찾아왔다. 외교관이었던 남편의 오지 근무를 위로하고자 마련된 여행이었다. “젊었을 때 돈 많이 벌어 가지고 늙거든 실컷 세계 일주를 하자”는 남편의 말에 나혜석은 “기운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칼날 같은 때 떠나야지, 늙어서 내 꼴 남 구경시키려고 다니겠느냐?”고 남편을 설득했다. 1927년 6월, 꿈에 그리던 1년 반 동안의 세계 여행을 떠나며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고민해 왔던 네 가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롭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란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폐쇄적이고 근대의 역사가 일천한 조선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단순히 호기심만 많은 관찰자가 아니었다. 언어가 잘 안 통함에도 외국인 가정에 자진 기숙하며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였음에도 나혜석은 말과 글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정신 및 의식주 개혁, 사회제도의 개선에 앞장섰다. 사회적 냉대, 가난, 고독 등으로 그녀의 꿈은 좌초되었지만, 그녀가 소리 높여 외친 바람직한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
금원과 나혜석의 삶을 움직인 힘은 호기심과 용기였다. 호기심은 의식주에 이은 인간의 네 번째 본능이라고 한다. 일반 사람들의 이 본능은 사회적 규범과 틀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지만, 앞선 세상을 내다본 듯 이 두 여성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쳤다. 물론 제도와 사회 안에서 그들의 실행은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한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일제강점기에 모든 방면에 능통했던 신여성 나혜석으로, 신분과 계급으로 이루어진 조선 시대에 금강산을 유람한 최초의 여성 여행가 금원으로 말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용기가 있었기에 그들은 앞선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에 한발 앞서 나갔던 수많은 금원과 나혜석이 있었기에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이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남들보다 앞섰던 위인들의 특별함은 특별한 데 있지 않다.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용기. 금원과 나혜석을 그 누구보다도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 요소였다.

글쓴이 박우찬

글쓴이 박우찬은 예술의전당에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를 비롯해 대구시립미술관건립 전담관,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학예연구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