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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대 위 영원한 지젤을 꿈꾸다
문훈숙 단장
글. 정혜옥 사진. 장호
30여 년 전 발레 불모지인 한국에서 발레를 시작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영국과 모나코에서 발레를 배우며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주역으로, 지젤 역의 무용수로 활약했다. 오로지 한길을 걸으며 열정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의 이야기다. 여전히 쉼표 없이 달리고 있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특별한 인터뷰어, 비서실의
김기원 매니저가 동행했다. 평소 현대무용에 관심이 많았던 김기원 매니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발레 분야가 더욱 알고 싶어졌다고.
문훈숙 단장의 현역 시절부터 앞으로 유니버설발레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그녀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발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저 같은 직장인은 오랫동안 한 분야에 계신 분들의 에너지가
참 궁금하거든요. 어떠한 원동력이 지금의 단장님을 만든 것일까요?
저에게 발레는 운명과도 같아요. 스스로를 몰아붙여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살게 하는 것이
발레였기 때문이죠. 사실 어린 시절엔 여러 번 발레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도 했어요. 외국에 나가 보니 신체적인 부족함이 눈에 보이고,
유학 시절 여러 차별을 겪으면서 동양인 무용수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했거든요. 또 당시에 우리나라는 발레라는 예술에 대한
인식이 낮아 환경적인 열악함도 있었고요. 풍족이 아닌 결핍,
그리고 그것을 인내하는 힘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 같아요.
물론 그 시간은 길고 혹독했지만요.
그렇다면 단장님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지난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은 다들 빨리 결과물을 보고 싶어 해요.
무용수들을 봐도 그렇고요. 어린 무용수들도 빨리 주연이
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와인이 오랜 기간 숙성되어야 좋은 맛과
향을 품듯이 기다리며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에는 그 시기에 모든 것을 던지고 무대, 발레에만
집중할 정도로 무모한 성실함이 있었어요. 거듭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도 부족함을 느끼니까 현역 시절에는
모든 에너지를 발레에 쏟아부었죠. 예술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죠. 예술을 통해서 내가 저명해지고,
예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나를 던져 놓으면
후에 평가와 명성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단장님은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가지셨더라고요.
고전 발레 〈지젤〉의 첫 동양인 무용수이자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주역으로도 활동하셨고요.
일찍 해서 그래요.(웃음) 그 당시에는 ‘최초’라는 개념조차
없어요. 앞서 제가 발레를 ‘운명’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눈앞에 주어진 것을 하나하나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기회가
오더라고요. 마린스키 무대에 서겠다거나 지젤 역할을
해야겠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운명처럼
제 앞에 놓였고, 이왕 할 거라면 최선을 다해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했어요.
누군가 이미 걸었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만들어 나가야 했기에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시간들은 단장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쉽지 않았죠. 부담감이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죠. 마린스키 무대는 러시아 최고의, 전설의 무용수들이 서던
무대예요. 거기에 서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죠. 그 공연뿐만 아니라
모든 공연의 시작 5분 전, 커튼 뒤에선 제 심장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쿵쾅거렸어요. 막이 오르기 전의 그 떨림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한참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도 떨림이
많았는데, 파바로티가 이런 인터뷰를 했더군요. “막이 오르기
전 5분은 나의 최고의 적이라도 그 순간을 겪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요. 세계적인 테너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그제야
좀 위로가 되더라고요. 최초로 무엇을 했다는 것보다 저에게 중요한
점은 항상 무대는 매번 새로운 도전이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발레 역사가 60년 정도 되는데 유럽 발레는
400년이 넘죠. 우리가 그 오랜 역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보를 좀 더 압축해서
한 스텝 더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도전을 멈추지 않으신 것 같아요. 지젤 역할을 꽤 오래 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젤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셨더라고요.
호주에 그램 머피라는 유명한 안무가가 있어요. 그분이 새롭게
각색한
<호두까기인형>
공연을 보았는데 굉장히 새롭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간 그분과 작업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
있었는데 정말 성사가 되었어요. 그렇게 우연히 그램 머피와
작업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신기하지만 고전발레 작품인〈지젤〉을
새롭게 구성해 보자고 그램 머피가 제안한 것도 신기했어요.
저 역시 그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굉장히 색다른 시도라는 평가가 많은데 기존의 〈지젤〉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플롯 구성도 달라졌지만 가장 큰 변화는 한국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에요. 무대 배경은 한국의 산으로 하고,
발레임에도 불구하고 꽹과리 같은 전통 악기가 등장하죠.
격정적인 안무와 국악기까지 도입해 ‘로맨틱 지젤’이 아닌
‘모던 지젤’을 완성했어요. 이렇게 계속 새로운 도전을 통해
무용수도 발레단도 성장하고, 대중에게 색다른 발레를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발레단이 가져야 할 목표라고 생각해요.
우리 발레단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해 나갈 거예요.
〈심청〉과 〈춘향〉 같은 한국 창작 발레를 선보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발레 역사가 60년 정도 되는데 유럽 발레는
400년이 넘죠. 우리가 그 오랜 역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보를 좀 더 압축해서 한 스텝 더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만의 유니크한 것을 보유하려고 시도한 것이
고전 작품을 발레에 차용한 것이죠〈심청〉은 2016년이 초연
30주년이에요.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립 연도와 같아요.
발레단을 창단하면서부터 우리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었던
작품이죠. 서양의 정서를 알 수 있는 클래식한 작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를 나타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여
되레 좋은 점수를 얻었어요.
외국에서도 우리나라 정서와 작품에 공감을 하던가요?
그럼요. 발레는 남녀의 사랑을 주로 하지만〈심청〉이나〈춘향〉은
효나 가족애에 대한 정서를 보여 주잖아요. 이 부분을 해외에서도
공감하면서 특색 있게 봐주더라고요. 세계적인 발레단의 추세를
보면 모던, 클래식, 모던 창작 작품을 다 선보이고 있어요. 결국은
발레단이 보유한 레퍼토리가 그 발레단의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그런 계획을 가지고 발레단을 운영하다 보니 차곡차곡 작품이
쌓였어요. 초기에는 명작을 선보였고 2001년부터는 현대 작품을
하고 있어요. 최근엔〈지젤〉을 재해석한 새로운 작품도 선보였고요.
또 다른 신작을 계속하며 앞으로 나아가야겠죠.
발레 〈춘향〉의 배경 음악이 특이하게도 차이콥스키 음악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사실 공연을 몇 주 앞두고 리허설을 해 보는데,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부분을 조금 더 디벨롭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음악을 바꾸기로 결정했어요. 차이콥스키의
명곡이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곡 위주로 편곡을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한 평론가가 그러더라고요. 발레〈춘향〉에서 신의 한 수는
음악이었다고. 새로운 시도가 신선했다고 말이죠.
단장님께서 선보이는 작품, 발레단의 행보 등에서
또 다른 ‘최초’를 기대해도 될까요?
사실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어요. 저기 위쪽, 바로 북한이에요.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마음속에 그 생각을
품고 있어요. 예술은 그런 힘이 있어요. 각자의 상황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서로 한데 뭉쳐 하나로 만들어 주는 힘, 예술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힘 같은 것이죠. 고대 그리스의
병원에서는 음악과 미술로 사람들을 치유했다고 해요. 좋은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고 감동하는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요. 정치,
종교, 사회적 분위기와 상관없이 하나 됨이 되게 하는 일은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봐요.
좋은 발레 작품을 선보이고, 반 걸음 더 먼저 나아가 새로운 것을
선보이는 것, 그것이 유니버설발레단의 행보가 될 겁니다.
김기원 매니저는 아주 비서실에서 인사 업무를 맡고 있다. 현대무용을 하는 친구의 영향으로 평소 무용에 관심이 많던 그는 문훈숙 단장을 만나 인터뷰를 한 이후로 발레 분야에도 견문을 넓히고자 한다는 후문.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아주인에게 드립니다. 인터뷰어가 되길 원하는 분은 『아주 좋은 날』 편집팀으로 연락 바랍니다. (담당: 커뮤니케이션팀 ajupr@a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