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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New Year

road trip

스칸디나비아의 거친 자연을 가슴에 담다

노르웨이의 길

글·사진. 손원천(서울신문 여행전문 기자)
박영훈 / 일러스트. 민지홍

살면서 질주를 즐기는 여행을 몇 번이나 할까?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여행에서 질주는 더 짜릿하다
‘북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의 노르웨이.
우리는 지금 그곳으로 떠난다. 여행이 주는 낯선 설렘과 진한 끌림에
여행을 떠나오기 전 일들과는 길 위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현실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 내 앞의 길을 꾸준히 따라가는 것.
그러다 문득 낯선 곳에 차를 세워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 이것이 자동차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올레순의 숙소에서 바라본 맞은편 설산과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 풍경

산과 물의 나라 노르웨이, 그곳으로 떠났다
바람이 차다. 빙하 위를 지나온 탓이다. 그리고 맑다. 코끝을 스칠 때마다 공기 알갱이가 부서지는 듯하다. 그 바람을 맞으며 노르웨이 중서부를 달렸다. 가보지 못한 길, 생소한 풍경들, 맡지 못한 향기를 찾아 나선 여정이다. 승용차를 빌려 항구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피오르를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항구도시 올레순으로 나오는 코스다. 섬과 바다, 터널과 산길을 승용차로, 또 페리로 달리고 건너는 여정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의 ‘골든 루트’였다. 하늘은 한 번도 우리 편에서 날씨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어렵사리 여정을 마친 일행 모두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아주 좋은 날은 이런 때 찾아오지 싶다. 고된 길을 함께 지나며 보고 듣고 담은 것을 미소 한 줄기로 공유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출발 전에 알아둘게 있다. 노르웨이 지명은 ‘~순’이나 ‘~달’로 끝나는 경우가 흔하다. 순(sund)은 수로물길, 달(dal)은 골짜기를 뜻한다. 둘 다 피오르 지형에서 비롯된 표현 양식이다. 따라서 두 단어로 끝나는 지역이 나온다면 필경 물가거나 협곡일 터다. 그리고 늘 돌발 변수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눈(雪)이 그렇다. 여름 초입에도 산 위엔 눈이 한가득이다. 이 탓에 갈 수 없는 곳도 생긴다. 이번 여정의 일부 구간에서 그랬다. 원래 코스는 크리스티안순에서 애틀랜틱 로드, 장미의 도시라 불리는 몰데, 트롤스티겐을 거쳐 예이랑에르 피오르로 가는 이른바 ‘골든 루트’였다. 한데 몰데와 예이랑에르 구간에서 문제가 생겼다. 쌓인 눈 탓에 도로가 폐쇄된 것이다. 저 유명한 트롤스티겐은 구경도 못했고, 예이랑에르를 코앞에 두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우회해 가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한데 피오르가 막고 있는 게 문제다. 피오르의 물길은 길고 거대하다. 피오르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도 거의 없다. 피오르를 건너는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은 페리다. 그러니 페리가 끊기는 시간에 이런 상황을 만나면 정말 낭패다. 늦게까지 페리가 운항하는 곳으로 아주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이 거리가 서울에서 대전 가는 것보다 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좀 돌아간들 어떠랴.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설산이 있는 곳. 피어오르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땅 노르웨이. 그곳에서는 이동 중에도
지루할 틈 없이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차를 세워 한참을
바라보다 또다시 길을 따라 나선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말이다
물길 따라 풍경이 흐르는 대자연의 파노라마

예이랑에르 피오르에서 바라본 풍경

여정의 들머리는 크리스티안순이다. 4개 섬으로 연결된 예쁜 항구도시다. 공항 렌터카 창구에서 차를 받자마자 64번 도로로 올라탔다. 첫 목적지는 애틀랜틱 로드다. 노르웨이의 18개 국립관광도로 중 하나이자 세계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며, 노르웨이 10대 사이클링 루트 중 하나다. 비유하자면 ‘말의 심장을 가진 사내들이 미친 듯이 달려 보고 싶은 도로’다. 애틀랜틱 로드는 약 9km 길이다. 개구리 뜀뛰듯, 크고 작은 섬을 7개의 다리로 이으며 지난다. 이 길의 핵심은 스토르세이순데트 다리다. 전남 진도의 울돌목처럼 조류가 굉음을 내며 흘러가는 길목 위에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한 타이어 회사의 광고 영상에 등장하면서 꽤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다리는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형태다. 그 덕에 사방 어디서 보든 풍경의 주인이 된다. 애틀랜틱 로드에서 해안을 따라 50km 정도 달리면 몰데에 닿는다. 흔히 ‘장미의 도시’라 부르는 곳. 몰데에선 도시 뒤편의 바르덴 전망대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해발 407m의 산자락에서 굽어보는 풍경이 더없이 빼어나다. 몰데 시가지와 피오르 해안, 그 너머로 설산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를 ‘몰데 파노라마’라고 부른다. 눈에 들어오는 설산만 모두 222개라고 한다.
문제의 이튿날. 목적지는 예이랑에르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피오르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E39(유러피안 로드) 도로와 국도 등을 번갈아 타며 산간 마을들을 누볐다. 피오르와 국립공원 산자락에 깃든 마을들은 노르웨이 시골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 줬다. 거칠고 투박하나 정겹고 향기로웠다. 코스의 반환점은 롬. 1150년경 세워졌다는 롬 스타브 교회가 인상적인 소도시다. 교회는 단단한 노르웨이산 소나무로 지어졌다. 지붕엔 용머리 조각을 세웠다. 용은 예전 바이킹이 액막이로 삼았던 동물이다. 교회 건물에 기독교와 바이킹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셈이다.
롬을 떠나 구절양장 산길을 오르면서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초록빛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오를수록 한겨울이다. 여기가 북극에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그간 잊고 있었던거다. 스멀스멀 내리던 안개비는 어느새 눈보라로 변했다. 게다가 예이랑에르로 넘어가는 산길은 폐쇄됐다.

1. (좌 상)노르웨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산 시장의 모습. 신선한 해산물이 가득하다
2. (좌 하) 애틀랜틱 로드에 있는 스토르세이순데트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가족의 모습
3. (우) 노르웨이 들판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

콧노래가 순식간에 탄식으로 바뀌었다. 노르웨이가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 왕국〉의 배경이 된 것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서둘러 구글 맵으로 우회로를 검색하니 주변에서 페리가 닿는 가장 가까운 곳은 헬레쉴트였다. 대략 50분 거리. 마지막 페리 출항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남았다. 페리에 오르기 위해 빠르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페리는 떠났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예이랑에르는 포기하고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느냐, 아니면 주민의 귀띔대로 늦게까지 페리가 운항한다는 스트란다 선착장을 향해 달려 보느냐다. 일행의 선택은 만장일치, ‘달리자’였다. 그리고 도착한 스트란다 선착장. 이어 배를 한 번 더 갈아탄 뒤 마침내 예이랑에르에 닿았다. 30분이면 갈 곳을 산길, 터널, 물길을 야수처럼 달려 밤 10시 무렵에야 도착했다. 5시간 가까이 우회한 셈이다. 그나마 노르웨이의 백야가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시도였지 싶다. 오후 9시를 넘긴 시간에도 길이 훤히 보였으니 말이다.
피오르와 호수 그리고 아르누보 미학의 항구도시
예이랑에르 피오르는 험준하다. 해발 1,000m를 넘는 산들이 좁고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이 험한 환경에서도 주민들은 염소와 양 등을 키우며 살아왔다. 이들이 일궈 낸 절벽 목축 문화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예이랑에르 피오르의 경관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전망대는 세 곳이다.
예이랑에르 마을 초입의 지그재그 도로 외르네스빙엔(영어로는 이글스 로드)과 마을 뒤 2km쯤 떨어진 곳의 플뤼달슈베트 전망대, 그리고 달스니바 전망대다. 이 가운데 달스니바 전망대는 워낙 눈이 많은 지역에 있어 여름철에만 공개된다. 험준한 예이랑에르 맞은편은 서정적인 노르피오르다. 작은 휴양 마을 로엔에서 계곡 상류를 향해 10여 분 차를 달리면 로바트네트 호수가 나온다. 유럽 최대 빙하인 브릭스달 빙하가 있는 요스테달 국립공원의 산자락 아래 형성된 자연호다. 만년설과 빙하를 머리에 인 고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쳤고, 짙푸른 물은 장판처럼 잔잔했다.
일행 중 한 명은 이를 보고 “달력 사진 속 풍경으로 들어온 느낌”이라고 했다. 산간 마을 헬레쉴트 인근에서 655번 도로를 타면 웅장한 노랑스달과 만난다. 자동차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을 터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곳을 제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노랑스달은 빙하가 흘러간 흔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거대한 협곡(달)이다. 이 길에서 유니온 호텔을 만난 건 뜻밖의 소득이었다. 19세기에 지어진 이 호텔은 꽤나 고풍스럽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 탐험가 로알 아문센,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 등이 이 호텔에서 묵어갔다고 한다. 방문마다 묵었던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는 올레순이다.
올레순은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모두 7개의 섬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악슬라 산 전망대에 오르면 도시 전체를 굽어볼 수 있다. 레고 블록 같은 건물과 좁은 수로를 오가는 크고 작은 배, 그리고 넓게 펼쳐진 주변 섬들이 ‘북유럽스러운’ 풍경을 펼쳐 낸다.
올레순을 흔히 ‘아르누보의 도시’라 부르는 것엔 아픈 사연이 있다. 1904년 겨울 화마가 도시를 휩쓸었다. 당시 건물 대부분이 목재로 지은 것이라 피해가 더 컸다. 이때 아르누보 사조에 영향을 받은 젊은 건축가들이 도시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3년에 걸쳐 대리석과 벽돌로 건축물을 지었다. 그 덕에 올레순은 유럽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아르누보 건축 양식이 밀집된 도시로 남게 되었다.
올레순에서 3개의 해저터널과 1개의 연도교를 따라 엘링쇠위아 섬과 발데뢰위아 섬, 이스케 섬을 거쳐 고되위아 섬까지 갈 수 있다. 길이 4km 안팎의 해저터널은 내리막 구간과 굽잇길이 많아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내리막의 경우 엔진 브레이크를 걸어도 금방 시속 100km에 달할 만큼 경사가 급하다. 해저터널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섬들은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되위아 섬의 호그스타이넨 등대가 특히 인상적이다. 북대서양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이겨 내고 있는 모습에서 강인함이 잔뜩 묻어난다. 등대 주변에 옛 고분 흔적과 두 개의 커다란 빗돌도 남아 있다.
마지막 밤. 숙소 맞은편의 빨간 등대가 반짝인다. 지어진 지 150년이 넘었다는 등대는 객실 1개짜리 실제 호텔이다. 한 호텔에서 특별 객실로 운영하고 있다. 1층은 침실, 2층은 욕실인데 하루 묵는 데 550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그 붉은 등대 너머로 백야의 해가 저문다.

올레순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색색깔의 집이 오밀조밀 자리한 가운데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