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016 SUMMER

insight

세상을 바꾼 퍼스트 무버,
관습과 차별을 깬 여성들

글. 이성주 일러스트. 민지홍

민족과 시대를 넘어선 김만덕과 조세핀 오필리아 페인. 그들은 조선을 사랑했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시대적 책무를 다하며 세상을 바꾼 여인들이다.
올곧고 꿋꿋한 정신으로 시대의 관습과 차별을 깬 두 여인이 걸어온 삶의 길을 조명해 보았다.
조선시대 푸른눈의 선구자
조세핀 오필리아 페인Josephine Ophelia Paine
조세핀 오필리아 페인이란 이름은 일반인에게 낯설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의 여성 사와 민족 독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녀는 1869년 2월 11일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보스턴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뉴잉글랜드 교사양성소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1891년 11월 한국 파송 선교사로 선임되어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했다. 그리고 1893년 9월 18일 이화학당장에 취임한 후 15년간 조선의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신분제 사회속 수많은 편견을 이겨낸
김 만 덕金 萬 德
김만덕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특별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가 바닥을 맴돌던 시기, 성공한 여성 CEO로서의 삶을 살았고, 이렇게 얻은 부(富)를 자신이 아닌 어려운 이웃과 나눈 점에서 본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만덕에 관한 역사상의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여성이었고, 양민이었으며, 조선인이었다는 점이 그녀를 잊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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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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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오필리아 페인은 조선인의 교육을 위해 한민족 최초의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만들었고, 중등교육 과정을 설치해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체계적인 신식 교육 기틀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나 주목해 봐야 할 것은 그녀가 한민족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과목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여성의 걸음걸이는 뒷발꿈치 높이 정도가 적당하다’라는 것이 당시 조선 사람들의 통념이었다.
그런데 오필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해야 할까?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은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걸린다고 생각한 그녀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라도 여학생들의 면역력을 높여야 하며,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방도는 운동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각에서는 이화학당에 다닌 여학생은 며느리로 삼지 않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는 체육 수업을 강행했다. 이러한 고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1895년 고종이 덕(德), 체(體), 지(知)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정한 ‘교육입국조서’를 공표하면서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후로 15년이 지난 191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학생들도 농구와 정구 등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치마’였다. 당시 조선의 한복 치마는 몸에 동여매는 형태였는데, 이 때문에 치마가 흘러내릴까 봐 여학생들이 마음껏 뛰지를 못했다. 이 모습을 본 이화학당 대학과 교수 진넨트 월터(Jeannette Walter)가 어깨허리 치마를 고안해 냈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복 치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깨끈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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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으로 ‘조선’을 사랑했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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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필리아는 ‘진정한 교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러일전쟁 당시 흉흉한 소문이 돌자 오필리아는 여학생을 기숙사에 보호하고 쌀과 어포 등 각종 식량을 비축해 이들이 혹여 모를 위해를 당하지 않을까 보호했고, 학생들을 위한 식사에 무척 관심을 가져 직접 가마를 타고 시장을 가 학생들이 먹을 음식을 구매했다. 학생들이 흰쌀밥만 먹는 통에 팥밥이 먹고 싶다 말을 하자 직접 팥을 사다 팥밥을 해 줄 정도로 인자했지만, 교육에서는 엄격함을 강조해 학생들로부터는 ‘아버지’라 불렸다고 한다.
오필리아는 학생만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 여학생을 넘어 조선 그 자체를 사랑했던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그녀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학생들을 모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조선 주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이렇듯 조선을 사랑했던 그녀지만, 1909년 해주 지방 전도사업을 위한 순회 중 안타깝게도 콜레라에 걸려 별세하고 말았다. 여학생들이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체육 수업을 시작한 그녀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다니, 아이러니한 그녀의 마지막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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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족쇄, 한 번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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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에 태어난 김만덕에게는 3개의 족쇄가 있었다.
첫째, 여자라는 점이다. 조선 초기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전조(前朝) 고려를 따라 꽤 높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녀균분상속제라 해서 딸도 아들처럼 재산을 상속받았고,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가 제사를 지낼 정도로 유교의 색채가 엷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잡겠다고 유교가 교조화되면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거세졌다.
둘째, 조실부모(早失父母). 제주도에서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열두 살 때 부모 모두를 잃고, 외삼촌 집에서 얹혀살았다.
셋째, 신분적 한계. 양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양인이란 신분적 한계로 인해 사회적으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 게다가 부모님 사후에 외삼촌 집에서 얹혀살던 그녀는 은퇴한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 수업을 받다 친가의 강요로 기생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김만덕의 삶은 한없이 처량하기만 하다. 그런 김만덕에게 영·정조 시대는 하나의 ‘기회’가 되어준다. 이앙법의 등장과 이로 인한 상업 경제의 발전, 화폐의 유통으로 조선의 상업 시장이 폭발하게 되는데, 그 정점을 찍은 시기가 영・정조 시기였던것이다. 이 시기에 김만덕은 사업 수완을 발휘해 유통으로 큰돈을 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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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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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제주도에 큰 태풍이 강타했다. 이 탓에 제주도는 흉년이 들었고, 졸지에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될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육지에서 쌀 500섬을 사 와서 제주 사람들을 구휼했다. 이 사실을 제주 목사 유사모가 조정에 전했고, 당시 왕이던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올려 직접 얼굴을 보고자했다. 조선 시대 양반도 아닌 양인 여인을 왕이 만난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 당대의 지식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조의 왼팔,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채제공과 정약용이 김만덕에 대한 기록을 글로 남길 정도였으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삶에서도 김만덕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는데, 모아놓은 재산 중 양아들의 생계를 위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주도 빈민의 구휼을 위해 써 달라며 통 큰 기부를 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성들의 특출난 공감능력의 발로라고 해야 할까? 김만덕은 자신이 모은 부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잘 알았던 현명하고 담대한 여성 CEO였던 것이다.
차별과 편견이 제도적으로 용인된 신분제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습을 이겨 내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 낸 두 여성. 그들의 올곧은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퍼스트 무버의 정신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글쓴이 이성주는 역사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전시 기획자, 역사 강사 등 시대를 읽는 문화콘텐츠 창작자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