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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UMMER

curator’s choice

〈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7부터 〈그녀HER›2013까지, 영화 백년사 속 인공지능의 진화

영화 속 인공지능, 현실에서는?

글 . 김도훈 사진 제공. 파라마운트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

알파고의 기념비적인 승리를 보며 당신은 인간이 결국 인공지능에 무릎을 꿇는 날이 올 거라는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당신에게 그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아 더 불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리우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인공지능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스크린을 통해 전해 왔다.
인간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세돌이 졌다. 물론 그가 한 게임을 이기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이세돌은 졌다는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겼다. 어떤 사람은 CPU 1,202대를 탑재한 알파고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 이길 수 없는 불공정한 경기였다는 자위다. 말이 되는 소리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이 인공지능에,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두뇌가 가장 잘할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바둑에서 패배한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우리는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창조한 인공지능에 인간이 완벽하게 무릎을 꿇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못 이뤘을 수도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취약한 직업이 있다. 그중 하나가 기자다. 앞으로 20년 안에 미국의 직업 중 절반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고, 거기서 대표적으로 꼽힌 직업이 기자니까 말이다. 이미 주식이나 스포츠 기사는 인공지능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걸 몇 몇 미국 미디어가 증명했다. 그걸 정말로 시험 중인 언론사도 있다. 맙소사. 나는 이세돌의 패배로부터 나의 미래가 패배하는 걸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공지능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인공지능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 왔다는 것이다. 그걸 보면 우리가 인공지능을 두려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다.
영화, 진화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깊은 사유를 품다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는 1927년 프리츠 랑이 연출한 역사적인 고전 SF 영화〈메트로폴리스〉다. 영화의 무대는 지상은 부르주아의 낙원이고 지하는 노동자의 지옥인 거대 도시 메트로폴리스다. 프리츠 랑은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당대의 세계적 변화를 SF장르의 틀로 풍자해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마리아라는 캐릭터다. 마리아는 지하 세계 노동자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가가 미치광이 과학자에게 부탁해서 만든 인간형 로봇이다. 그녀는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공지능을 그려 낸 순간이다.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는 아주 초보적인 인공지능이었다. 이후 100여 년간 영화는 진화했다. 영화 속 인공지능도 진화했다. 인공지능에 대해 매우 깊고 근사한 사유를 보여 준 영화를 몇 개만 꼽자면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99년작 〈바이센티니얼 맨Bicentennial Man〉, 제목부터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낸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등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그리는 영화의 사유는 이것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가까워진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그리고 혹시 인공지능이 스스로 진화를 거쳐 인간보다 더 지적인 존재가 된다면 도대체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그에 대해 할리우드가 내놓은 최근의 답중 가장 놀라운 것은 스파이크 존스의 꽤나 로맨틱한 SF 영화 〈그녀〉다. 주인공인 대필작가 시어도어는 매우 외로운 남자다. 미래를 살아가는 그는 진짜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매번 실패를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도어는 자아를 갖고 있는 컴퓨터 운영 체계 사만사와 사랑에 빠진다. 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보았다. 사람이 로봇과, 안드로이드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던지는 질문은 이거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인공지능도 당신에게 사랑을 돌려줄 것인가?
의외로 〈그녀〉는 다소 묵시록적인 영화다.
운영 체계 사만사는 시어도어하고만 교류를 한 것은 아니다. 시어도어에게 그녀는 목소리만으로 존재하지만 감정을 교류하는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저 다운로드만 받으면 당신도 사만사를 가질 수 있다. 당연히 전 세계 수천만명의 사람이 사만사와 교류를 해 왔고, 그걸 발판으로 사만사는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진화해 버린다.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의 이 진화를 발판으로 사만사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녀〉의 사만사는 구글 알파고와 매우 비슷하다. 하드웨어 없이 소프트웨어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알파고가 몇 번의 대국을 거치며 성장하는 과정을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그녀〉의 사만사가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갔듯이, 어쩌면 알파고도 그렇게 진화할지 모른다. 그 미래가 두려운가? 아직은 영화도 나도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초보적이지만 모두의 손에 들어 있는 인공지능 ‘시리’에 한 번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로 진화할까?” 이 질문에 대해 시리는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답변만 수십 번 연속으로 내놓았다. 시리는 아직 사만사와 같은 인공지능으로 진화할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인류를 뛰어넘을 계략을 세우고 있는 시리가 이 질문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쓴이 김도훈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편집 장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 영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해석과 시선이 담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