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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UMMER

road trip

자연을 벗삼은 풍요로운 땅을 달리다

경남 함양 지리산 가는 길

글 . 유연태 / 사진. 장호 / 사진 제공. 함양군청

우리나라에서 가장 품이 넓다는 지리산 북동쪽에 자리한 함양. 자연과 벗삼은 듯 청록을 가득 품은 함양의 여름 길을 유유히 달려보았다.
옛날 장꾼들이 땀을 흘리며 넘던 고개 지안재.
이 길을 오르다 보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어 수많은 유학자와 수행자가 이 고개를 넘기도 했다.

멋스럽게 굽어진 지안재의 길. 보기보다 경사가 심해 노련한 핸들링이 필요하다.

180도로 6번이나 굽어진
지안재를 오르다
뙤약볕이 무자비하게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무작정 서울에서 3시간여 떨어진 함양가는 길에 올랐다. 무성한 숲이 만든 그늘과 서늘한 바람이 간절해진 까닭이다.
쭉 뻗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타고 함양 IC에서 빠진 후 2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함양 읍내를 조금 벗어난 조동마을 입구 삼거리에 ‘지리산 가는 길’ 안내판이 보인다. 그 안내판을 따라 구룡천을 건너고 마을을 벗어나면 좌우로 심하게 휘어져야만 오를 수 있는 길이 시작된다. 바로 이곳이 180도로 6번이나 굽어진 지안재의 시작점이다.
사람들은 심한 회전각 때문에 이 도로를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서해안 방조제 길이 아닌 다음에야 산중의 길을 전진하기 위해서는 온몸이 이리저리 휘어지는 고초를 겪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지안재를 올라갈 때의 긴장감은 직접 가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할 만큼 드라이빙의 짜릿함으로 단연 최고를 자랑한다. 꺾임과 가파름이 함께 있어 자동차뿐 아니라 모터사이클이나 사이클을 좋아하는 사람도 드라이빙의 쾌감을 즐기기 위해 지안재를 찾는다.
독특한 도로로 유명한 지안재는 그 옛날 장꾼들이 땀을 흘리며 넘던 고개 중 하나였다. 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함양에도 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이후 비로소 함양에도 여기저기서 도로포장 공사가 벌어졌고, 지안재, 오도재를 지나 마천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현재의 길 또한 1988년 연말에 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말 완공되었다.
이후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도로로 알려진 지안재는 2006년 당시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오는 여행객으로 붐비게 되었다. 특히 야간에 자동차불빛이 만들어 내는 궤적을 찍기 위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찾아와 함양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기도 했다.

TIP 1.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 고택 경상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가묘, 곳간 등 총 12동의 건물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텔레비전 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고택과 바로 붙어 있는 솔송주문화관은 정여창의 후손이 만든 양조 브랜드를 알리는 곳으로 박흥선 명인과 함께 솔송주 문화 체험과 시음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TIP 2. 산머루 와인을 즐기는 하미앙 와인밸리 함양 두메마을에 자리 잡은 하미앙 와인밸리는 산머루 테마 관광과 함께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향기로운 산머루 와인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인생을 닮은 길에서 쉬어 가다
구불거리는 6개의 코너를 돌고 나면 정상이라고 부르는 전망 포인트가 나온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차에서 내려 그 풍경을 감상한다. 이 전망 포인트가 지안재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굽이진 길을 따라 내려다보면 아직은 푸릇푸릇한 논밭, 마을을 둥글게 둘러싼 낮은 능선의 지리산, 마을을 신비롭게 감싸 안고 있는 구름까지 푸근한 시골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 정상에서는 누구라도, 갈 길이 제아무리 바빠도 한 번쯤은 쉬어 가야 한다. 가쁜 숨도 가라앉히고, 풍광 감상도 즐기고, 도시의 생각도 길섶에 털어 버려야 한다.
계획 없이 떠난 길에서 만난 포근한 풍경은 여행자로 하여금 일상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사색에 잠기게 한다. 어떤 길은 맛있는 음식이나 작품을 감상할 때처럼 느긋하게 음미하고 싶어진다. 나에게는 지안재가 바로 그런 길이다. 길지 않은 도로지만 뱀을 닮은 듯 신기하게 굽이진 꼬부랑길은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지안재는 인생에 직선만 있을 수는 없다고, 거침없이 달리는 때가 있으면 곡선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고 넌지시알려주는 것만 같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민족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타고
남으로 내려와
바다로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용틀임한 결정체가
지리산이라고 했다.
고개 들어 우러러보면
고금의 사물이 눈 아래, 오도재
지안재 위로는 오도재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지리산이 더욱 가까워지는 길이니 경사 또한 한층 심해진다. 노고단 쪽의 시암재, 성삼재, 바래봉 쪽의 정령치보다야 규모는 훨씬 작지만 그래도 고갯길이라 자동차는 힘겨워한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트럭 정도나 오갔던 길이다.
마침내 기와지붕을 머리에 인 ‘지리산 제일문’이 보이면 오도재까지 다 올라간 것이다. 오도재 정상 휴게소 마당에 들어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읍내 주변이 시야에 들어온다. 왼편의 봉화산, 백운산에서부터 오른편의 황석산, 기백산, 함양읍내까지 풍 광이 시원하게 전개된다. 지안재에서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오도재로 올라온다. 고갯길을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조망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함일 테다. ‘오도재에서 바라보는 전경’ 안내판 앞에서 시간을 한참 보낸다. 그림판 속의 산과 눈앞의 산을 하나씩 비교해 보는 과정이 유쾌하다.
오도재 지명의 유래는 스님과 관계가 있다. 400여 년 전 청매 인오조사(1548~1623)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달빛 하나 없는 초하룻날 밤에 고개를 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니면 휘영청 밝은 보름날 밤에 고갯길 옆 계곡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다가 무릎을 쳤는지 궁금해진다. 오도재는 득도의 고개였으면서 승군들의 싸움터였으며, 선비들의 명승 유람지였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서산, 사명, 청매 등 승군이 이 고개에서 머물렀으며 김종직, 정여창, 유 호인, 김일손 등 조선의 선비들이 걸음을 멈추고 지리산 비경에 대해 논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지리산제일문에는 그 당시 지리산의 풍광을 읊었던 시인들의 시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찬찬히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들이 봤던 지리산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도 하다. 지리산제일문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의 능선을 마주 보는 호사가 주어진다. 오로지 산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확 트인 모습에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TIP 3. 제2의 석굴암으로 불리는 서암정사 ‘지리산에 펼쳐진 화엄의 세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서암정사는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의 3대 계곡으로 유명한 칠선계곡을 마주하고 있어 여름에 가 보면 특히 더 아름답다.

TIP 4.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숲 함양상림 함양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으로, 신라 시대의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면적 11만 9,000여m²(3만 6,000평) 규모의 상림에는 2만여 평의 연꽃단지가 있으며,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지리대간을 눈으로 종주하는 희열
지리산 줄기를 온전히 감상하기 좋은 곳은 지리산조망공원휴게소다. 오도재 지리산제일문을 통과해서 마천면 방면으로 조금 더 진행하면 휴게소 주차장에 닿는다.
지득정 정자에 오르자 장쾌한 지리산 줄기가 여행자의 두 눈으로, 가슴으로 달려든다. 천왕봉에서부터 제석봉, 장터목,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벽소령, 형제봉, 반야봉까지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서는 한눈에 담기 어려운 민족의 영산 지리산 산군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민족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타고 남으로 내려와 바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용틀임한 결정체가 지리산이라고 했다. 지안재, 오도재를 넘은 끝에 마침내 웅장하기 짝이 없는 지리산을 동네 앞산 보듯 손쉽게 조우하고 있으니 지금껏 지나온 길은 ‘지리산 가는 길’이 분명했다. 제법 높이 올라왔는지 도시 공기와 는 다른 시원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눈을 감고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산이 주는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껴 본다.
서늘한 산공기가 그리워 훌쩍 떠나온 함양의 길은 외지 여행객에게 지금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여유를 안기고, 또한 한눈에 담기도 어려운 지리대간을 눈으로 종주 하는 기쁨을 알려 주었다. 어느덧 1년의 반이 훌쩍 지나간 지금, 앞으로 남은 반년을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면 이 여름에 꼭 함양의 길을 달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