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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SUMMER

scene of object

레옹&마틸다, 사랑과 비극의 방아쇠

레이밴 선글라스

글. 정재광

허름한 코트에 화분을 든 남자와 똑단발의 소녀.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누구나 떠올리는 마지막 조각. 바로 동그란 선글라스다. 캐릭터를 완성하는 소품으로 이보다 더 강력한 게 있을까? 수많은 대중문화의 상징을 넘어 선글라스 그 자체를 대표하게 된 이름, 레이밴이다.
사랑과 비극을 품은 선글라스
빌딩 정글을 날아오던 카메라의 시선은 점점 좁혀지다 청부살인업자인 레옹(장 르노)의 까만 선글라스에 멈춘다. 타깃을 전달받은 그는 냉철하고 정확하게 임무를 수행한 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선글라스를 벗은 레옹은 얌전히 앉아 우유를 마시고 정성스레 화분을 가꾼다. 넋을 놓은 채 진 켈리의 뮤지컬을 즐기는 그는 나이 많은 소년이다. 옆집 소녀는 사는 게 지옥이다. 학교엔 안 간 지 오래고 집에서는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 유일하게 사랑하던 남동생마저 잃어버린 날, 그녀의 애타는 눈빛을 저버리지 못한 레옹은 고민 끝에 문을 열어 준다. 비로소 한 줄기 빛을 만나게 된 소녀. 복수를 꿈꾸는 그녀의 이름은 마틸다(내털리 포트먼)다.
청부살인업자와 소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이 야속한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비극을 향해 간다. 마틸다가 레옹의 선글라스를 쓰고 스스로 복수를 하겠다며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먼)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행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틸다가 그런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들의 관계는 성사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옹의 선글라스가 마틸다에게 이어지고 그로 인해 비극이 발생한 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필연이었다. 레옹의 선글라스는 순수함을 가려 주던 청부살인업자의 눈이자, 레옹과 마틸다의 비극을 앞당긴 방아쇠였다. 방아쇠가 당겨지자 레옹과 마틸다의 사랑이 펼쳐졌고 그 사랑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유와 성장이라는 선물을 남겼다.
전쟁부터 할리우드까지,
레이밴의 여정
레옹과 마틸다의 연결 고리이자 비극의 상징인 선글라스는 레이밴의 RB3447 모델이다. 레이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필요로 인해 탄생한 선글라스다. 군사 경쟁으로 전투기가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면서, 태양 광선에 직접 노출되기 시작한 파일럿들은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이에 존 매크레디 중위가 바슈롬사에 조종사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한 안경을 의뢰했고, 바슈롬사는 짙은 초록색 렌즈의 보안경을 제작했다. 1937년 이를 상품화해 출시한 것이 바로 레이밴 ‘에이비에이터Aviator’ 모델이다.
탁월한 기능성을 갖춘 전문 용품이라는 이름을 얻은 레이밴은 전후의 할리우드와 결합하며 문화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모델이 바로 레이밴 ‘웨이페 어러Wayfarer’다. 1955년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웨이페어러를 착용하고 등장한 순간부터 이 검은 안경은 당대의 젊음과 저항의 에너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처럼 레이밴의 선글라스는 계속해서 스타들의 신비감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스타와 대중을 이어 주는 창 역할을 해냈다. 밥 딜런, 키스 리처즈, 믹 재거 같은 록 스타부터 존F. 케네디, 존 레논, 앤디 워홀에 이르는 유명 인사까지 레이밴과 어울린 시대의 아이콘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1999년 룩소티카 그룹에 인수된 뒤부터 오늘날까지 레이밴은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져 왔다. 최근에는 첫 번째 모델이었던 에이비에이터를 재해석하며 고유의 가치를 이어 가는 동시에 유튜브를 이용해 젊은 고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의 거리, 많은 사람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표정을 읽을 수 없기에 우리는 자꾸만 검은 안경 뒤에 감춰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공군 조종사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한 안경을 고민했던 장교의 이야기, 소녀를 사랑하게 된 나이든 소년의 이야기, 어딘가에 정착해 행복을 꿈꾸고 있을 소녀의 이야기. 그렇게 바라보고 귀 기울이며 또 한 번의 여름을 보낸다. 빛나는 선글라스 레이밴과 함께.

티파니에서 아침을

화려한 신분 상승을 꿈꾸는 홀리는 아침이면 커피와 빵을 들고티파니 본점의 창문을 들여다보는 그녀만의 의식을 치른다. 검은 지방시 드레스와 티아라, 진주 목걸이에 더해 이 장면을 완성해 주었던 것은 웨이페어러였다.

탑건

레이밴과 함께한 최고의 스타는 톰 크루즈다. 비행 때를 빼고는 거의 모든 시간에 착용한 그의 RB3025 에이비에이터는 지상까지도 자유로운 상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공중전보다 험난한 사랑전을 위한 그만의 훌륭한 무기, 역시 레이밴이었다.

레옹의 선글라스를 마틸다가 물려받는 순간, 이야기는 아름다운 비극을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