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혼족,
소외와 고립에서 벗어나
공동체에 이르는 길
글 김찬호
혼밥(혼자 밥 먹기),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과 같은 신조어가 쏟아지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로부터 탈피해 스스로의 행복에 집중하겠다며 자발적 고립을
택하는 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맥,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변화 속에 놓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독자성을 지키면서도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립을 넘어, 독립적 개인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길은 결코 멀리 있지만은 않다.
孤立
고립
우리는 왜 외톨이가 되어 가는가
지난해 다음소프트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데이터를 하나 내놓았다. 트위터와 블로그의 글 5만여 개에서 ‘인간관계’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를 분석해 본 것이다. 그 결과 1위는 ‘무섭다’였
다. 그다음으로 ‘허전하다’, ‘힘들다’, ‘스트레스’와 같은 단어가 집계되었다. 우리 시대의 마음 풍경을 반영하는 자료다.
이런 상황에서 외톨이의 삶을 선택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주로 젊은이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30대가 두드러진다. 스마트폰 이용 내역과 관련된 통계를 살펴보면(한국인은 스마트폰을 어떻게 쓰나, 닐슨
코리아·KT경제경영연구소), 20대는 게임(42.8분)보다 소통(59.3분)의 비중이 훨씬 높다. 그런데 30대로 올라가면 정반대로 뒤집힌다(게임 61분, 소통 30.6분). 심지어 10대(게임 32.3분, 소통 42.3분)보다
30대와 40대(게임 51.9분, 소통 26.4분)의 게임 시간 비중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대까지는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연애도 하며 더불어 지내다가, 30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고립된 섬이 되어 가
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맥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 원인으로 급속한 사회 변동과 구태의연한 통념 사이의 괴리를 짚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젊은 사원들과 권위
주의에 얽매여 있는 기성세대의 의식이 충돌하며 긴장을 빚는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끼리의 소통이 원활한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이는 성장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족 구성원의 수가 줄어들고 특히 형제자
매가 적어지면서 어린 시절에 필요한 관계 맺기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데다 주거 환경이 변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 기회도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미디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시공간을 초
월한 소통 환경을 창출했다. 그러나 디지털 신호로 주고받는 대화는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차원에 머물 때가 많다. 30대 이후에 인간관계가 줄어드는 것은 아마 그 시기부터 필요해지는 전인격적인 만남이 어려워졌
기 때문이 아닐까.
혼밥이나 혼술을 즐기는 얼로너Aloner의 증가에 시장은 발 빠르게 대응한다. 1코노미 트렌드에 발맞춰 다채로운 상품과 마케팅을 선보인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혼자서만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당
연한 수순처럼 인간관계의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외로움만 달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관계가 절실한 상황이 있다. 자신의 나약함과 결핍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상대, 상처와 고통을 온전히 안아 줄 벗 말이다.
獨立
독립
독자성을 지키며 공존하는 법
타인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정서적인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이
튼튼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의 고독한 대면이 요구된다. ‘고독孤獨’은 상이한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다. ‘고’와 ‘독’ 두 글자에 각각 ‘립’ 자를 붙여보자. ‘고립
孤立’과 ‘독립獨立’이 된다.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르면, 고립에 이르고 만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혼자 서 있는 고독의 시간을,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충만하게 교류하는 공유의 시간을 적절하게 확보해야 한다. 모바일 통신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휴대전화가 울리기 때문에 자신에게 오롯이 몰입하지 못한다. 또한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인들이
카페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광경에서처럼, 정보의 반짝임을
좇느라 곁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으로 맞이하지 못한다.
늘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은 나약해지거나 때로 난폭해진다. 반대로 자기 세계에 갇혀 외톨이로만 지내는 사람은 타자와의 접점을 갖지 못한다. 이 두 유형의 극단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의 일부다. 단절된 소통을 아쉬워하면서 타인에게 이르는 통로를 더듬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을 발견할 수 있다. 그섬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자가 만들어 놓은 테두리를 벗어나 중립지대에서 만날 때 비로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수 있다. 섬에 이르면 일인칭과 이인칭의 배타적인 긴장에서 풀려나 삼인칭의 시선으로 각자를 되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타자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때로 더불어 일을 도모해야 하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독자성을 지키면서 공생할 수 있는 해답은 이 섬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고립되고 단절된 세계를 잇는 가교架橋다. 서로가 상대방 또는 다른 집단과의 거리를 의식하면서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백을 통해 공통의 의미
세계를 빚어낼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음악 연주를 듣는 청중들은 제각기 존재하다 연주가 흐르는 순간 하나가 되어 공명한다. 예술에
심취할 때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듯이, 가교를 건너며 마음 깊숙한 곳에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기운을 끌어내고 그 기운을 매개로 타인과의 소통, 공명을 도모할 때 삶은 위대한 은총으로 빛난다.
김찬호 교수 한국의 사회 현상을 쉽고 명쾌하게 해석해 온 사회학자. 대표 저서로 『모멸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