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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SUMMER

Now + Moment

자연의 삶과 사람의 삶을 간직한
낭만 산골, 무주

글 김선녀 기자
사진 김재경, 김병옥,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예로부터 안개가 깊고, 첩첩 산에 둘러싸여 사람의 발길이 적었다던 무주는 손닿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경이롭고 신비한 땅이었다. 산 높고 물 맑은 무주에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바람이 불고, 산골 구석구석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궁벽진 산골의 대명사

적상산사고

“무주 구천동 투표함이 도착해야 선거가 끝난다”라는 말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쓰던 우스갯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민 요 ‘시집살이 노래’는 “시집왔네 시집왔네, 무주 구천동에 시집왔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듣기만 해도 팍팍하고, 힘겨웠을 시집살이만 큼 지세 험난한 동네가 바로 이 무주였단다.그도 그럴 것이 군 전체가 소백산맥에 속하는 무주군은 덕유산, 적상산, 민주지산, 대덕산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 또한 해발 400m 이상으로 온 동네가 산 중턱 어딘가인 셈이다. 그래서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의 앞말을 따서 ‘무진장’으로 불리는 동북쪽의 산간 지역에는 전북의 지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장수군에서 시작된 금강은 진안군을 거쳐 무주군 에만 들어서면 심하게 곡류하는데, 이는 골짜기가 좁고 깊으며, 험준한 지형이 발달하게 된원인이다. 이 덕에 우리는 골짜기마다 고인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이 빚어낸 무주의 가치
하도 첩첩이라 “사돈의 팔촌에 정승 하나 없다” 했던 무주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에겐 안전한 은신처이자 숨은 이상향이었다. 덕유산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난리를 겪을 때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해 덕德이 큰 산”이라 불리기도 했고, 세종 때의 학자 김종직은 무주 근처의 마이산을 두고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것이 말의 귀와 같고나. 높이는 몇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라고 노래했다.
첩첩 산과 깊은 골짜기가 신경 써 만들어 놓은 무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발걸음을 들여놓기만 하면 그 짙은 푸르름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조선 시대 이후의 흥망성쇠를 예언한 『정감록鄭鑑錄』에는 ‘십승지지十勝之地’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 후기 이상향에 관한 사람들의 사회적 담론이었는데, 십승지 지의 입지 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중 하나가 바로 무주 무풍茂豊이었던 건 상당히 자연스러 운 결과였다.

수심대의 다리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산골 무주는 그런 연유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많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조선 말 혹시 닥칠지 모르는 난세를 피하기 위해 마련했던 명성황후의 행궁인 ‘명례궁明禮宮’ 터 역시 무주에서 고요히 시간을 지키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무주는 왕과 백성은 물론 조선의 정신과 치열한 역사의 기록을 지켜낸 천해의 요새였다. 『태조강헌대왕실록』부터 『철종실록』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왕조의 실록 28종을 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자료다. 조선 시대의 실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 그 관리가 엄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편찬한 『조선왕조실록』은 4개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전쟁이나 화재를 피할 수 있도록 주로 깊은 산중이나 섬지방의 수호사찰이 있는 곳으로 장소를 골랐다. 무주 안성면의 적상산사고는 300여 년에 달하는 조선 역사의 한 부분을 안전하게 지켜낸 곳이다. 조선왕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뒤 무주에 왕가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게 했다. 조선 시대의 산골 마을 ‘무주현’이 ‘무주도호부’로 승격되었던 것 역시 적상산사고 덕분이었다.

제28경 구천폭포

무주가 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을 꼽자면 덕유산 무주 구천동의 33경이다. “9,000번을 굽이쳐서 구천동이다”라는 말과 같이 구불구불한 물길이 만든 계곡을 따라서 용이 누운 듯한 와룡담臥龍潭, 학이 둥지를 틀었다던 학소대鶴巢臺, 물돌이 명소인 수심대水心臺,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구천폭포九千瀑布 등 33개의 절경이 늘어서 있다. 풍경을 따라가다 지치면 사시사철 맑고 차가운 물이 솟아나 여름에도 솜이불을 덮고 잘 정도라는 구천동의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달래 보아도 좋을 것이다.

Tip.1 무주가 품은 자연의 신비

  1. 덕이 많고 너그러운 덕유산
    해발 1,614m,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명산이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사찰을 품고 있다.
  2. 시간의 아름다움 무주삼공리반송
    무주 삼공리 보안마을에 있는 반송으로 구천동의 상징이다. 천연기념물 제291호로 지정되었으며, 고고한 시간을 이어 간다.
  3.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칠연계곡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 소와 담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칠연폭포와 용추폭포의 시원한 물살이 감탄을 자아낸다.
전설 속 반딧불이가 사는 곳

여름밤의 반딧불이 / ©Ron Yorgason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호롱불 밝힐 기름도 없을 만큼 가난했던 중국의 학자 손강과 차윤이 반딧불이를 명주 주머니에 넣고 그 빛을 비춰 공부를 했다는 옛이야 기에서 유래된 고사다.
고대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형설지공의 사연 역시 이제 그저 전설로 남았는지 모른다. 요즘 반딧불이로 책을 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기때문이다. 사실 반딧불이를 직접 눈으로 보는 일조차 귀한 경험이 되었다. ‘개똥벌레’라고도 부르는 반딧불이는 몹시 예민하고 깔끔한 곤충이다. 미세먼지와 환경오염이 가득한 도시는 당연하고, 문명이 조금이라도 들어선 일반 시골도 반딧불이에게는 살곳이 못 된다.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된 유별난 곤충 반딧불이의 서식지는 무주 설천면의 남대천 일대다. 이곳에 서식하는 반딧불이는 애반 딧불이와 늦반딧불이 두 종류다. 애반딧불이는 유충 시절, 다슬기를 잡아먹으며 물속에서 살고, 늦반딧불이는 달팽이, 고둥류를 먹이로 삼아 축축한 수풀 속에서 자란다. 무주의 청정한 자연을 반딧불이가 몸소 증명하는 셈이다. 애반딧불이는 6월 중순에서 7월 중순, 늦반딧불이는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서서히 떠오르며 무주의 여름을 수놓는다.

신비한 반딧불이의 빛 / ©smithmakaay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반딧불이의 서식지 무주는 이를 기념하고, 더 많은 사람과 자연을 배우고, 즐기는 경험을 나누기 위해 매년 ‘무주반딧불축제’를 개최한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반딧불이 서식지에 직접 찾아가 반딧불이를 관찰하는 탐사체험이다. 깜깜한 밤, 낮은 야산에 낸 좁다란 탐방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 자체가 도시 사람들에겐 색다른 경험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달빛에 의지해 조용히 거닐어야 하는데, 두메산골 깨끗한 자연에 꽁꽁 숨어 사는 반딧불이가 까만 숲속에 점점이 나타나며 빛을 내는 순간은 가히 감동적이다.
올해 무주반딧불축제는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되는데, 탐사 체험 외에도 반디랜드에서 반딧불이의 일생을 관찰 하거나 식물원에 들러 150여 종의 열대식물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천문과학관에서는 쏟아져 내릴 듯한 별을 관람할 수 있다.
낭만적인 영화 소풍
무주반딧불축제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오는 무주의 대표적인 축제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별빛과 달빛,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야외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낭만적인 영화 축제 ‘무주산골영화제’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테마의 영화제가 손님을 맞이하지만 2013년에 시작해 올해 다섯 번째를 맞이한 무주산골영화제는 다른 영화제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무주산골영화제

‘좋은 영화 다시 보기’라는 소박한 취지의 무료 상영, 야외에서 진행되는 아티스트들의 공연도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답답한 극장 대신 천장이 뻥 뚫린 무주등나무운동장이나 덕유산 국립공원에서 하늘의 별과 달을 조명 삼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티켓팅이니 인터넷 예매니 하는 삭막한 준비 과정대신 보고 싶은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에 담요와 돗자리, 두툼한 외투를 챙겨 조금 일찍 상영장에 도착하는 부지런만 있으면 된다.
무주산골영화제는 빡빡한 현대인의 일상에 느긋한 여유를 선물한다. 탁 트인 잔디밭에 앉아 스크린 위 영화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다른 영화제처럼 화려한 레드카펫은 없지만 싱그러운 그린카펫 위에서 엄선된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드넓은 자연 속에서 감성을 되살리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 슬며시 찾아온 무주 주민들과 섞여 한참을 앉아 있으면 몸도 마음도 무주인이 된다.
무주산골영화제 기간에는 영화 상영 외에도 관련 전시, 영화인들이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 음악 공연 등이 곳곳에서 열린다. 조용하던 산골 무주가 특별한 영화 소풍을 나온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차며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산골, 무주의 영화 잔치는 매년 6월, 그것도 단 4~5일간만 진행된다. 이 짧은 기간이 아쉬워 매년 다음 해를 다시 기약하곤 한다.

Tip.2 제21회 무주반딧불축제 즐기기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9일간의 여정으로 손 님맞이에 나선 무주반딧불축제. 홈페이지(firefly.or.kr)에서 일정 확인 및 예약이 가능하다.

  1. 살아있는 학습장 무주반디랜드
    무주 청정 환경의 상징인 반딧불이를 테마로 한 학습장이다. 희귀한 곤충을 만나볼 수 있는 곤충박물관부터 야영장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 무주반딧불축제 시기에 둘러보기 좋다.
  2. 정겨움이 반짝이는 무주반딧불장터
    무주 삼공리 보안마을에 있는 반송으로 구천동의 상징이다. 천연기념물 제291호로 지정되었으며, 고고한 시간을 이어 간다.
무주의 삶을 담은 건축가

땅의 흐름을 품은 무주서창향토박물관
무주의 땅과 사람들을 기억하고 나누기 위한 공간으로 구상, 설계되었다. 지금은 종합관광안내센터로 그 용도가 바뀌어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나눔의 건축으로 잘 알려진 故 정기용 건축가는 지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년에 걸쳐 무주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무주 지역의 면사무소와 납골당, 공설운동장 등 크고 작은 공공 건축물 30여 개의 설계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현대 한국 건축계에서 한 명의 건축가가 하나의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크고 오랜 시간을 들인 건축계의 큰 사건으로 손꼽힌다.

백운산 줄기에 낀 반지 무주반디별천문과학관
사람의 손등처럼 생긴 백운산 산등성이에 정기용 건축가가 지은 천문대.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외관의 건물에서 무주의 하늘과 우주를 만날 수 있다.

정기용은 사람과 건축물, 땅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생각하는 건축가였다. 그는 10년간 무주 곳곳에 주민들을 위한 공공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건축을 통해 농촌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자 했다. 전환기를 겪고있는 농촌 문제가 도시에 사는 모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을 위한 공간 안성면주민자치센터
단순 행정 기구로서의 면사무소가 아닌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의 재구성을 지향했다. 주민들의 한마디에 목욕탕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 큰 특징.

그가 무주에 만든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는 안성면주민자치센터다. 행정 기구로서의 면사무소를 지역 주민을 위한, 지역 주민에 의한 공간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으로, 답답한 주차장을 건물 뒤편으로 옮겨 입구에 서면 길게 뻗은 덕유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넓게 펼쳐진다. 안성면 주민자치센터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주민이 활발하게 이용하는 작은 공중목욕탕이 딸려 있다. 면사무소보다 “목욕탕이나 하나 지어 달라”던주민들의 요청을 반영해 마련한 뜻깊은 공간 무주의 사람 그리고 땅과의 감응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이다. 목욕탕 유지비를 줄이기 위해 규모를 작게 짓고, 홀수 날은 남탕, 짝수 날은 여탕으로 정해 남녀가 이틀에 한 번씩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주민, 자연과의 감응 무주등나무운동장
관중석에 그늘이 없어 행사가 있을 때 주민들을 초대하기가 미안했던 군수의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등나무 그늘 운동장은 무주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

무주등나무운동장은 그의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주민과 식물이 주인인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는 경험이, 주민들에게는 고마운 그늘막이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공설운동장으로 불렸던 과거에는 드넓은 운동장의 관중석 중 군수나 VIP가 앉는 본부석에만 햇빛을 가리는 지붕이 있었지만, 지금은 관중석 전체를 등나무가 가려주고 있다. 권위주의를 바꾸고자 했던 지역 군수의 아이디어와 건축가의 기술이 합쳐져 만든 흐뭇한 풍경이다. 그 밖에도 마을의 납골당을 비롯해 전통 재래시장과 버스정류장 등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만든 공공 건축물이 무주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만든 건물이 지어진 지도 10년이 넘었다. 잘 사용하고 있는 것도 주민들에 의해 조금씩 바뀐 것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썰렁하게 빈 곳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건물이 아닌 도시와 농촌, 자연과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 담긴 진심이었다. 건축을 매개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지혜를 발견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무주 주민의 삶 속에 여전히 녹아들어 있다.

Tip.3 공간의 시인 정기용 건축가

  1. 경험의 기록 감응의 건축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년 동안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서 펼친 공공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2. 삶의 메시지 말하는 건축가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건축가 정기용의 삶과 철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