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SPECIAL
영원한 청년 청남 문태식, 영면에 이르다
글. 편집부 자료 제공. 아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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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그룹 창업주이자 한국콘크리트업계의 대부 문태식 명예회장이 2014년 12월 26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큰 자취는 아주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를 추모하며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들고 가족과 집을 나섰다. 나들이를 다녀온 다음에는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며 한 장의 사진을 완성했다. 효과 하나 없는 사진 한 장에 가족의 하루가 예쁘게 담겼다.” 아버지를 따라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아들의 추억이다. “할아버지는 늘 깊이 생각하고 침묵으로 대화하는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주말 저녁 동네 산책 후 서점에 들러 책 한 권 사 주는 것으로 손녀 사랑을 표현하셨다. 할아버지는 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지 말고 개척자 정신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혼탁한 세상에서 멈추어 서 있지 말고 어느 곳에서나 도전하고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다.” 엄숙하고 조용한 조부를 그리는 손녀의 기억이다. 그의 부재는 남은 이들의 가슴에 커다란 빈터를 남겨 놓았다. 아들과 손녀는 추억을 곱씹으며 떠나간 이의 발자취를 반추해 본다.
문태식 명예회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흉상이 중랑구청 청사에 세워졌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다
1928년 2월, 문태식 명예회장이 태어났을 때 한반도는 일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일제에 대한 충성과 황국화를 강요받았던 암울한 시대에 얼어붙은 것은 한강만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빙기였다. 이렇다 할 사업적 기반이라고는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다. 당시 농가의 형편은 쌀을 수확해도 일본인 중간업자에게 헐값으로 수매를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때문에 어느 농가에서든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기는 쉽지 않았고, 보통학교만 마치면 농사일에 파묻히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1년 2월 서울 대창학원을 졸업한 데 이어 1943년 당시 불광동에 있던 5년제 대신상업전수학교를 진학했다. 졸업 후 일본계 가네보 방적공장에 취직한 것이 사회생활의 첫걸음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 모두가 부러워하는 탄탄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첫 직장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일본인 매니저와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그는 일본인 매니저가 행하는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참기 어려웠고, 결국 미련 없이 회사를 관두었다. 8・15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초의 일이다.
청년 문태식, 세상에 뛰어들다
하루아침에 일제의 억압 속 냉엄한 현실에 놓인 청년 문태식은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내 나라에서 떳떳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가 부강해져야 한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나라의 근본인 농업이 지탱돼야 하고,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건설 산업이 부흥해야 한다고 판단, 두 산업의 주요 자재인 목재 관련 사업을 벌여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곧 그의 귀에 평안북도 강계의 박달나무가 목질이 단단하고 쓸 만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곧바로 청년 문태식은 강계로 길을 나섰다. 일제의 전시 체제로 교통편이 무척 힘들었지만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모아 박달나무 목재를 구입하기 위해 강계행을 택한 것이다. 갖은 고생 끝에 강계의 박달나무를 이용해 목재 사업을 시작했지만 상황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는 사이 일제는 조선인 특별 지원병과 근로보국대라는 명목으로 강제 징병과 징용을 더욱 강화했다. 1945년 해방 전까지 조선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00여만 명의 조선인들이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사력을 다해 군수 물자 생산에 주력했다. 경인 지방은 물론 전국 각지에 군용 기지, 비행장, 군수 공장, 군수품 저장소 등 각종 군수 시설 공사를 급격히 늘려 갔고, 징병을 위한 학도병 훈련에도 열을 올렸다.
당시 학도병 훈련에 사용되는 목총은 자주 부러져 목총 판매상들은 재질이 단단한 목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청년 문태식이 만든 자루를 접하고 단단한 박달나무로 목총을 만들기 위해 너도 나도 목재 자루를 사갔다. 이를 통해 청년 문태식은 사업가로서의 첫 기반을 쌓게 된 반면, 약소국의 설움 역시 깨달았다. 훈련소에 입소한 어린 학생들이 핫바지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목총으로 사격 연습 하는 것을 목도한 직후였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만든 목재 자루가 일본의 전쟁을 위한 목총으로 둔갑하다니, 식민지 조국의 뼈아픈 현실을 깨달은 그는 목재 자루 판매를 스스로 그만두었다. 사업가와 조국의 일원 사이에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기술 도입을 위해 선진 업체의 기술을 파악하며 아주산업을 창업한 문태식 명예회장(좌측 끝)
인생 도처에 청산이 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수립된 정부는 안정과 질서 유지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우선적으로 경제의 완전한 자본주의화가 필요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생산의 확대와 경제의 안정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건설 사업이 활성화되었지만 해방 후 건설 현장이나 농사에 쓰이던 삽이나 곡괭이 자루는 부러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덕분에 그는 가지고 있던 단단한 박달나무 자루 재고를 처분하여 사업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렇다 할 사업을 찾지 못한 그는 일단 부동산 구입에 자금을 투자하기로 했다. 아버님의 조언에 따라 지금의 덕소 근방에 논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때 채권으로 바뀌어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는 바람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어렵게 다진 사업 기반이 또 다시 흔들렸다.
이때 그는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인생 가는 곳마다 푸른 희망이 있다는 뜻을 품은 문장 한 줄에마음을 다독이며 1946년 6월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 1949년 3월 졸업했다. 이곳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동안 국가 보은에 대한 사명감과 국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경제 부국의 꿈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휴지 조각이 된 채권의 일부를 현금화하여 목탄차를 구입했다. 목탄차는 적재함 앞쪽 왼편 귀퉁이에 목탄가스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숯불 화통을 설치하고 그 밑에는 냉각관과 여과기 등 250kg이 넘는 무거운 장치를 달아야 갈 수 있는 자동차였다. 아침 일찍 화물을 싣고 가려면 새벽부터 화통에 숯을 가득 채우고는 화통 밑에 달린 선풍기를 열심히 돌려 불을 벌겋게 피워야 가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차례 고역을 치르고 나면 운전수와 조수는 온통 까맣게 변하기 일쑤였고, 운행 중 소나기라도 만나면 피웠던 숯불이 몽땅 꺼지는 바람에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또 한 차례 번거로운 수고를 치러야 하는 고달픈 상황의 연속이었다. 장작을 싣고 다니다가 사람을 태우기도 했다. 위험하고 차가 힘이 없어 못 간다며 승차 거부를 해도 사람들은 태산 같은 짐 위로 올라탔다. 당시에는 버스가 귀해 트럭이 버스 역할까지 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목탄차 운행으로 번 돈으로 트럭을 샀다. 하지만 트럭에 대한 이렇다 할 지식이 없던 그의 트럭은 너무 수리를 많이 해 거의 못 쓸 지경이었다.
망우원심력 공장 종업 및 상봉시외버스터미널 기공식
아주의 초석을 다지다
1953년 3월 1일 을지로 상가에 아주시멘트산업상사를 설립하고 일본 오노다시멘트에서 몇천 톤의 시멘트를 수입, 판매업을 시작했다. 목탄차 물류 사업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돈을 모아 시멘트 수입 대리점을 시작한 것이다.
사업은 물론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9년 일본에서 수입한 백시멘트를 무개차에 싣고 올라오던 중 태풍 사라를 만났다. 시멘트는 물에 젖으면 굳어 못 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 많은 시멘트가 완전히 젖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본 것이다. 청량리역에서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를 빨리 가져가라고 난리였고, 주인은 애물단지를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허둥댔다. 그런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입힌 태풍 사라 때문에 재건 공사를 해야 하는데 모든 건설 물자가 품귀 현상을 보인 것이다. 건설업자들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버린 시멘트를 빻아서 주든지, 그냥 주든지, 어쨌든 팔라고 야단이었다. 인생도처유청산, 그의 철학이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1960년 9월 그는 아주산업을 설립했다. 당시 나무도 많지 않은 나라에서 나무 전신주를 세운다는 것은 큰 국가적 손실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아주산업 설립 이후 콘크리트 전주 사업은 확장 일로에 있었다. 수입 나무 전주를 콘크리트 전주로 국산화하며 전기 보급에 크게 일조하는 등 산업화 시대를 맞아 콘크리트 전주 사업은 각광받았다. 하지만 한국 전력에 거의 독점으로 납품하던 콘크리트 전주 사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콘크리트 전주 회사가 난립하면서 생산 단가가 낮아지고 아주산업 공장에 있던 기술자를 빼가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그가 새로운 사업 구상차 산업연수단 일원으로 유럽의 산업을 시찰했던 시기이다. 그는 유럽의 산업 발전을 목도하며 다시 한 번 사회 간접자본 시설의 시급성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열정을 품고 후에 레미콘, 아스콘과 같은 국가 기반이 될 수 있는 사업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그의 열정은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13년 48인의 자선 사업가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증명됨은 물론 ‘아주’라는 기업명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는 문태식 명예회장이 창업 당시부터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아주 정신의 모태, 개척자 정신을 토대로 아주그룹의 성장과 발전의 초석을 세운 그는 미래를 앞서간 참 기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