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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NEW YEAR

PICTORIALISM OF LIGHT

카메라, 빛과 어둠의 찰나를 포착하다

글. 이상엽(사진가, 르포르타주 작가)

구본창, 「AM 07 BW」(2006),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화면을 터치하면 닫힙니다

한 점의 예술품을 공유하다
19세기 중엽, 이제 막 발명된 카메라는 광학과 화학의 최신 결정체였다. 당연히 이 카메라의 목적은 광자를 통해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포토그래피(photography)’라는 이름을 선사한 천문학자 존 허셜은 자연의 사물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박물관과 미술관의 형태가 완성되어 가던 즈음, 사진은 또 하나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바로 예술품 복제가 그것이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말대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에는 아우라가 있고, 이것은 무엇으로도 교환될 수 없다. 사진은 바로 이 오리지널을 가장 근사체로 복제해 내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에 담긴 의미도 여기에 있다. 그의 대형 사진은 실물보다 무척 크게, 우리 눈이 볼 수 없는 디테일까지 선사한다. 사진 속 백자는 조선의 미학을 잘 보여 주는 흔치 않은 명작으로서 아우라를 뿜어 낸다. 이를 가장 오래된 사진의 방식으로 재현한 구본창은 어쩔 수 없는 수집가가 되고 만다. 그는 백자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관찰해서 그 의미를 파악해 냈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복제술을 통해 이 한 점의 예술품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했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구본창의 백자 사진은 예술인가? 예술품을 찍은 예술 사진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인다. 게다가 구본창의 사진보다 그 아이디어와 구체적 시도가 더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태균, 「침묵하는 돌」(2002)

역사 속 객관의 예술
사진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미학을 보여 주었다. 미술이라는 기존의 배경과는 무관한 독자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스티글리츠와 루이스 하인, 폴 스트랜드를 거쳐 워커 에반스에 와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다큐멘터리란 연출되지 않고 중립적이며 객관화된 사진을 일컫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반적인 기록(다큐)과는 달리 예술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사회 변혁을 시도하는 사진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 특히 대공황기에 미국 농업안정국FSA의 소속 사진가로 활동한 워커 에반스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소설가 지망생이던 그는 카메라를 들고 연출하지 않은 빛의 고유함을 잡아 그만의 예술적 성취를 담아 냈다.
아마도 에반스처럼 예정되지 않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피사체를 담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권태균이 그러하다. 그의 고인돌 연작은 사진가가 목격자로서만 존재하는 사진일 것이다. 고대인의 무덤 옆에 있는 지금의 농부는 권태균의 철학을 있는 그대로 말해 준다. ‘역사성 앞에서 견디어 온 인간의 삶’ 말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 연대기 속 사람들은 우리 땅 농촌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는 때로는 아이러니를, 때로는 고단함과 절망을, 때로는 희망을 역사 속 아카이브 한 장으로 담아내어 정리하고 가끔 내보인다.

이갑철, 「해탈을 꿈꾸며 2」(1993)

보는 사람마다 다른 사물의 실체
현대 사진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 이민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1958년 기념비적인 책 『미국인들』을 발표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인종 차별과 빈부 차, 어두운 골목길 소수자들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하는 것이 거절되었다.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미국의 모습은 당국을 불편하게 했다. 결국 책은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델피르 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듬해 미국 출판사에서도 부랴부랴 달려들면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아마도 작가 이갑철에게 이 책과 프랭크는 표상이었을 것이다. 청년 이갑철은 이 책과 사진을 끼고 살았고, 남들이 객관성이라는 올무에 걸려 포토 저널리즘에 뛰어들 때 사회를 남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이갑철의 주관적인 작품 「타인의 땅」은 로버트 프랭크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리고 선승들이 부처를 죽여야 부처에 이른다고 했듯이 그도 선생을 죽여야 했다.
그리하여 그의 1990년대 작업인 『충돌과 반동』은 한국적 주관주의를 완성했다. 스타일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를 따르되 내용은 철저하게 그가 느낀 한국의 땅으로 채웠다. 사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한국과 한국인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보는 사람마다 사물의 실체도,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 내 방식도 세상에 존재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갑철은 사진으로 증거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제시할 뿐이다

민병헌, 「Hanriver RT029」(2011), 한미사진미술관

풍경을 재해석 하다
사진이 탄생한 이후 카메라는 점차 소수의 지식인과 과학자의 손에서 미술가들에게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상 사진과 풍경 사진이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미술가들이 사진판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픽토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린 회화주의 시대의 사진은 연초점, 질감 있는 종이 사용 등으로 회화를 흉내 내거나 뛰어넘으려 했다.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도 1887년 런던의 사진 살롱에서 에머슨에 의해 발탁된 뒤 픽토리얼리즘에 가담했다. 민병헌의 사진은 이러한 회화주의 사진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사진의 여러 가능성 중에서 이 역사적인 부분에 심취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어 가고 있다. 그는 흑백 필름에 은염 프린트를 고집하는 스트레이트 사진가다. 암실에서 별다른 조작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사진분리파 운동의 스티글리츠를 잇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사진은 콘트라스트가 약하고 계조가 넓다.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미세한 광선을 분리해 낸다. 이로써 우리가 볼 수 없는 풍경을 재해석한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근대적 산물의 전위성을 제외한다면 민병헌은 분명 퀄리티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진이 없었다면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찰나도 후세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줄 길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미학적으로.

이상엽

이상엽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다. 『사진가로 사는 법』, 『최후의 언어』 등의 책을 썼고, ‘변경’, ‘이상한 숲, DMZ’ 등의 사진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