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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NEW YEAR

JOY OF LIFE

삶의 옷, 집의 즐거움

삼대가 모여 사는 즐거움

글. 이용한(시인) 사진. 안홍범

우리 삶의 옷이라 할 수 있는 집의 풍경이 점차 진화하고 있다. 여럿 사람이 그것도 삼대가 한공간에서 ‘함께하고’, ‘더불어 살고’, ‘교감’하는 삶을 가꾸어 가는 그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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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요즘 손주를 두고 하는 노인들의 우스갯소리다.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말이다. 핵가족 시대에 자녀와 따로 떨어져 사는 노인들에게 손주는 그야말로 반가운 손님이다. 하지만 잠시라도 손주를 돌보거나 놀아 주는 일은 노인들에게 피곤하고 부담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물며 맞벌이 자식을 위해 손주 양육을 떠맡은 노인들의 고충은 오죽할까. 사실 측은하기로는 손주를 맡길 수밖에 없는 젊은 부모의 현실도 만만치않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퇴근 후 다시 육아와 가사를 담당한다는 것은 ‘초 울트라 슈퍼 우먼’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대가족 제도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마냥 핵가족을 고집하며 살기도 불안하다. 최근에는 이것의 절충을 시도하는 ‘신 대가족’ 형태도 만날 수 있다. 자녀와 부모가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가구에 거주하는 ‘페런츠 하우스(parents house)’나, 2~3세대가 출입문이 다른 하나의 아파트를 쓰는 ‘세대 분리 아파트’가그런 경우다. 그러나 아무래도 서로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긴밀하게 도움을 주고받으려면 부모와 자식이 근거리 이웃으로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벨기에에서 만난 다니엘의 집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러한 풍경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얼마 전 벨기에에 갔을 때 초대를 받아 방문한 다니엘(Daniel De Spae)의 집도 그러하다. 이 가족은 부모와 자식이 이웃해서 사는데, 사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벨기에서 아주 흔한 편이다. 유럽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에도 개인주의가 팽배하지만,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는 미덕은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고결한 가치로 여겨진다. 특히 다니엘 가족의 가족주의 는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오히려 지극한 면이 있었다.
다니엘의 집은 소도시인 에버햄 인근의 목가적인 풍경속에 자리해 있다. 이곳은 말똥 냄새와 풀 냄새가 적당히 뒤섞인 전형적인 플랑드르(벨기에 북부)의 농촌이다. 네덜란드와 불과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흔히 플랑드르 사람들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차이가 집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가령 네덜란드의 집들이 작고 딱딱하며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반면, 이곳의 집들은 느슨하고 자연스러운 여유가 있다. 이에 대해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덜란드는 너무 단정하고 규칙적이에요. 반면 여기는 훨씬 자유롭고 낭만적이죠. 그래서 네덜란드인들은 곧잘 벨지안의 낭만성을 질투합니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 속에 자리한 다니엘의 집. 숲 속 오솔길을 연상시키는 오붓한 출입로를 지나자 소박하고 정갈한 농가 한 채가 정원의 품속에 들어앉아 있다. 기역 자 모양에 주황색 기와를 얹은 전형적인 플랑드르 농가다. 다니엘은 이 집에서 약 40년을 살았다. 그에 따르면 이 농가는 과거 직물업자가 살던 곳으로, 1680년에 지었다고 한다. 옛날 그대로의 집에 새로 지은 집을 덧붙여 지금의 기역 자 모양을 이루었는 데, 두 집은 애당초 한 집인 양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통해 있다.

손주들을 위해 다양한 가축을 키우는 다니엘

따뜻함이 묻어나는 대가족 풍경
때마침 다니엘 식구는 아침 식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다니엘 부부와 아들 내외가 식탁에 둘러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주말이면 다니엘 가족은 아들과 딸내외, 손주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한다. 오늘을 위해 며느리는 집에서 몸에 좋은 곡물 빵을 구워 왔다. 매번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빵을 구워 오는 일은 이제 며느리의 주중 행사가 되었을 정도다. 딸 내외와 손주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식탁 빈 자리에는 오지 않은 식구들의 찻잔과 나이프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에야 딸 내외가 손주를 데리고 들어섰다. 아이들이 들어서자 집 안은 금세 활기가 넘쳤고, 왁자지껄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삼대가 어울린 대가족 풍경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식사는 일주일치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길어진다. 아침상에서의 화제는 단연 손주의 이야기였다. 그저 일상적인 에피소드에도 식탁 위에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아침 식사를 다 마친 뒤에는 늘 그래 왔듯 아이들 손을 잡고 후원 산책에 나선다. 앞뜰의 연못과 산책로를 돌아 후원으로 가는 길에 다니엘은 라즈베리 나무에 열린 붉은 딸기를 하나씩 따 손녀와 손자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제법 맛이 좋은지 손녀가 더 따 달라고 조르는 통에 할아버지는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입에만 넣어 주었지만, 다른 식구들에게도 골고루 하나씩 건네주었다.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에게도 한 움큼 딸기를 건네주었다.

다니엘 가족은 주말 아침이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

후원에는 수국꽃을 비롯하여 다양한 꽃을 심어 놓았다. 호두나무와 사과나무 등 과실수도 여기저기 심어놓았다. 돼지우리와 염소 목장도 후원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서는 돼지와 염소, 개를 비롯하여 거위, 닭, 양까지 기른다. 얼마 전까지는 망아지를 키우다 딸의 집으로 분양시켰다고 한다. 다니엘은 식용이 아닌 순전히 애완용으로 가축을 키운다. 또한 손주들이 오면 심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집 주변에는 나무 다섯 그루가 전부였어요. 과거에는 대서소에서 일했는데, 일을 그만두고는 지금처럼 하루하루 집과 정원을 가꾸며 살았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일구어 낸 공간입니다.” 다니엘에 따르면 그가 일구어 낸 집과 정원은 무려 7,500제곱미터에 이른다. 버드나무와 포플러, 사과나무, 상수리나무를 비롯하여 모두 30여 종의 나무를 심었다. 또한 수선화, 수국, 옥잠화를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꽃도 심어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집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여러 점의 조각 작품도 후원에 전시되어 있다. 잔디밭에는 잎이 지는 모양의 조각품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족들이 다니엘 모르게 조각가 힐다(Hilda Houtekeete)에게 부탁해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조각을 워낙 좋아하는 그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서 깜짝 선물을 한 것이다. 다니엘은 이렇게 가꾼 집을 닫아 놓지만은 않는다. 1년에 두 번, 장미가 피는 6월과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면 다니엘은 일반인들에게 이곳을 무료로 개방한다. 후원만 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주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연주회를 곁들인 파티도 연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약 120명이 모였어요. 잔디 마당에서 음악회도 열고, 빵과 와인을 즐기고, 집도 구경시키죠.”이날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다니엘은 특별히 맥주파티를 베풀었다. 가까운 이웃에서 생산되는 10여 종의 맥주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벨기에에서는 여러 세대를 거쳐 가업을 잇는 소규모 맥주 공장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현재 생산되는 맥주의 종류만 해도 1천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맥주 파티가 열리는 동안 손주들과 할아버지는 후원에서 공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벨기에 속담에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도 다니엘의 집을 나서며 활짝 웃었다.

후원 산책 중 발견한 붉은 딸기는 손주들의 차지다

이용한

이용한은 시인이자 작가로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쓴다. 『안녕 고양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 제작과 시나리오에도 참여했으며, 『바람의 여행자: 길 위에서 받아 적은 몽골』, 『사라져 가는 오지 마을을 찾아서』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