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015 NEW YEAR

DIGITAL CREATIVE

르 콩소르시움 공동 디렉터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눈을 가져라!
김승덕

글. 곽문주

점점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전보다 예술은 우리의 일상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것 같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예술은 낯설고 어렵다. 이에 대해 한평생 국제 무대에서 활동해 온 김승덕 디렉터는 “예술은 우리와 늘 함께 호흡하는 무엇이며, 우리 일상의 복지”라고 말한다. 예술이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듯, 우리도 예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화면을 터치하면 닫힙니다

실험과 도전의 공간, 르 콩소르시움
도로 곳곳에 올빼미가 그려진 금색 마크를 흔히 볼 수 있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디종. 이곳은 13세기 부르고 뉴 건축의 걸작 노트르담 성당과 공작궁, 20세기 초 유행한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그라니에 광장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르 콩소르시움 아트센터가 이 도시의 대표 명소로 꼽힌다. 이곳은 1977년 작은 책방에서 시작했다. 2011년에는 주변의 공간을 영입하여 시게루 반(올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바 있다)이 디자인했는데, 유럽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간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승덕디렉터는 2001년부터 르 콩소르시움 국제 프로젝트 디렉터로 합류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를 종횡무진하며 글로벌 라이프를 실현하고 있다. 그동안 네덜란드, 호주, 미국 등지로 순회하며 쿠사마 야요이와 린다 벵글리스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2007 문화 수도 릴 ‘플라워 파워’ 전, 2005 발렌시아 비엔날레 후에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총감독을 역임했다.
“르 콩소르시움에는 13명이 함께 일해요. 저, 프랑크 고트로, 자비에 두류, 에릭 트롱시가 디렉터 급이죠. 디렉터와 어시스턴트 업무에 상하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큰 틀만 정하고 나머지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며 일을 벌이지요. 지금은 대가로 성장한 다니엘 뷔렌, 한스 아케, 로렌스 뷔너 작가들의 기념비적 전시들이 이곳에서 열렸어요. 신디 셔먼과 리차드 프린스 작가의 전시도 80년대 이곳에서 열렸고요.”
본래 ‘콩소르시움’이라는 말에는 ‘협업’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르 콩소르시움에는 전시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책방에서 시작된 르 콩소르시움은 그 태동기 때부터 ‘예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양한 담론과 작품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전시 공간과 함께 출판사 레프레스뒤레알과 칸느영화제 월계수상을 수상한 영화사 아나산더스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획일 사회에 일침 놓는 예술가들
“미술 작가들은 시대를 읽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할 따름이죠. 그 시각적 언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읽어 낼 수 있어요.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레프레스뒤레알은 미술 전문 서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문 철학 서적도 출판한다. 그녀는 출간 검토 도서로 베를린 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투명 사회』를 최근 눈여겨 보고 있다고 한다. “한 교수가 이야기하는 투명 사회란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 사회를 의미한다.”
그는 한국의 사회상과 가치관을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로 드라마를 꼽는다.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드라마를 빠짐 없이 검색한다. “관료적 사회에서 우리 각자는 전체를 볼 수 없어요. 적어도 예술가는 시스템 밖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거죠. 그런 사유의 힘이 인문학으로 연결되고, 삶의 주체로 서려는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르 콩소르시움 설립자 겸 공동 디렉터인 후랑크 고트로 와 짐드레인 작품 앞에서

나는 더 이상 큐레이터가 아니다
그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 인터뷰에서 왜 ‘예술은 혁명이다’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겠다. 그리고 그의 지나온 이력이 더욱 궁금해졌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사를 전공했죠.” 그 당시에 화가 문미애 선생과 조각가 한용진 선생이 지인의 이웃집에 살고 있어 주말에 자주 놀러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김종학, 김창열 선생님 등을 뵙게 됐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술계와 관련한 일을 할 생각은 못했어요.” 그는 문화 예술에 전반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교내 연극에서 몰리에르의 타루 튀프 역을 맡은 적도 있단다. 동양 여자가 남장으로 주인공을 맡아 상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틈틈이 용돈도 벌 겸 패션계에서도 일했다고.
“한국에서 88올림픽조각공원 준비가 한창일 때 외국어를 한다는 이유로 데니스 오펜하임, 라파엘 소토 등 해외 참여 작가 60여 명을 돕는 일로 국내에 들어왔어요. 그 일을 계기로 동시대 예술에 눈뜨게 되면서 대학원에 들어가 미술사를 다시 공부했죠.” 그는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 성향 탓인지 MOMA나 휘트니미술관보다는 대안적 성격의 뉴욕 뉴뮤지엄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큐레이터의 어원은 ‘쿠라레’입니다. 라틴어로 ‘돌보다’ 는 뜻이죠. 쉽게 말하자면 큐레이터는 작품을 돌보고 나아가 작가와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사람인 거죠.” 그는 2007년 유럽의 문화 도시로 지정된 프랑스의 릴에서 꽃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해야 했다. ‘자칫 잘못 다루면 진부해질 수 있는 주제이지만, 그는 자기 색이 강한 개성 넘치는 작가들을 디렉팅하여 세계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시 이후, 당시 릴의 시장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대신 전했다고 한다. “최근 현대음악 콘서트를 다녀왔는데, 아이들이 너무 즐겁게 음악을 즐기기에 물었죠. ‘현대음악이 어렵지 않니?’ ‘아뇨. 지난번 ‘플라워 파워’ 전에서 현대미술도 즐겁게 봤는걸요. 그것과 이것이 뭐가 다르죠?’라고 하더군요.”“그런 순간 가장 큰 보람을 느끼죠. 치열하게 고민한 시대정신을 즐겁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해요. 작가나 관객 모두 행복해지는 게 예술의 가치 아닐까요?” 그는 큐레이터이면서 큐레이터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큐레이터, 커미셔너, 미술 관리자, 매니저, 기획자, 프로듀서, 문화 정치가,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직까지 없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가 활동하는 분야가세상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통용되는 마지막 지대라는 믿음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의 예술
미술이 왜 대중에게 어렵게 느껴질까. 이 질문에 그는 문화 행정가들의 책임도 강조했다. 2008년에만 100여개의 전시 공간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한국에서 미술이 대중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지방 자치 단체나 큐레이터들의 책임이라면서 그녀는 프랑스 블리세이라는 시골 마을의 사례를 소개했다. “주민이 27명뿐인 이 마을의 옛 빨래터를 공공 미술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레미 조그(Remy Zaugg)라는 작가가 공무원들과 더불어 8년 동안 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훌륭한 공간을 만들어 줄 테니 감사한 줄 알라’는 자세가 아니라 꾸준히 대화를 나눈 끝에 새로운 연못이 만들어지고 상상도 못했던 관광 명소가 탄생된 거죠.” 그는 우리나라 지자체에서도 유명 연예인들을 동원한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기획하는 ‘소통과 공감의 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런 취지에서 직접 커미셔너로 나서 안양 공공미술프로젝트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저는 예술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프리 존(Free zone)’이라고 생각해요. 예술가들이 하는 일도 결국 일상을 위한 복지와 같아요. 정치가에게는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열어 주고, 노동자에게는 쉼과 에너지를 줄 수 있어야 하죠.” 그리고 그는 시민들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술의 복잡한 층을 떠도는 정보를 흡수하듯 쉽게 단숨에 읽으려 하지 말고, 일상생활 밖으로 잠시 비껴 나와 곱씹고 곱씹어 보는 것, 그것이 예술과 문화 교육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동 디렉터
김승덕 공동 디렉터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예술과 문화의 교육의 장이 될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디자인 랩 총괄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다. “2015년 9월 개관 예정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디자인 랩 구축을 르콩소르시엄과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했죠. 프랑크 고트로와 제가 공동 감독을 맡았어요. 문화전당을 하나로 꿰는 통합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문화전당을 개관할 때까지 전당의 내외부 공용 공간 디자인을 다듬고 보강하게 된다. 르 콩소르시엄은 문화전당이 개관하는 2015년에는 창작제작센터를 바탕으로 지역 연계 문화 상품 개발, 페스티벌 개최 등 디자인 관련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르 콩소르시엄은 그간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 미술을 소개했고, 카타르 도하 도시 재생 프로젝트, 팔레드 도쿄 프로그램 자문 등 다양한 도시 공간에서 현대 예술을 풀어 냈어요. 아시아문화전당을 통해 광주가 예술의 도시로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일 겁니다.” 르 콩소르시엄이 파리 남동쪽에 있는 디종에서 기획력으로 출발하여 국제적으로 자리매김한 만큼 광주에서 펼칠 활동도 기대된다.
“작가나 큐레이터는 아이디어를 파는 사람입니다. 좋은 에너지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면 사회에서 보약으로 쓰일 수 있어요.”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낼 보약을 곧 맛보게 될 것이다.

곽문주

곽문주는 세상을 관찰하고, 느끼고, 표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그 사이의 공간을 좋아한다. 그 공간에서 서로 ‘다르다’를 느끼고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