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HOPEFUL DAY
아주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콘크리트 전봇대가 한국에 등장한 까닭은?
글. 조시영(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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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동남아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와 달리 네모난 형태의 전봇대를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콘크리트 전봇대와 나무 전봇대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국을 여행할 때면 눈에 들어오는 길거리 풍경 가운데 하나가 나무 전봇대다. 어떤 지역에서는 썩지 말라고 콜타르를
짙게 발라 놓은 것이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면서 벗겨져 길거리의 흉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대도시의 중심 골목에는 전선을 모두 땅속에 심은 ‘지중화’가 되어 있지만 세계적인 도시 뉴욕에서도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나무 전봇대를 흔히 볼 수 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천조국(千兆國)’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가진 미국은 나무 전봇대를 쓰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콘크리트 전봇대를 쓸까? 그 비밀은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에 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 산들은 대부분 벌거숭이가 되었다. 전깃줄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50년 이상 키운 길이 10m가 넘는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산에 그런 나무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일본이나 캐나다에서 키운 50년이 넘은 목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가 감당하기에는 값비싼 수입 자재였고, 수입에 어려움이 있어 제때 공급할 수조차 없었다.
남다른 안목으로 시작된 콘크리트 전봇대
이미 농기구 자루 사업으로 사업가적 자질을 키워 온 당시 30대 청년 사업가였던 아주의 故 문태식 명예회장은 바로 이 전봇대에 주목했다. 시멘트 무역 사업을 하며 성신양회, 한일시멘트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건자재 분야에서 펼친 남다른 안목을 가진 그였다.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콘크리트로 만들면 5분이면 가능한 일인데, 비싼 외화를 들여 몇 달 몇 년씩 걸려 굳이 나무 전주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어촌에도 전기가 들어가던 시절이라 그렇게 많은 나무 전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전기 수요가 늘어나고 전주 사용이 많아지면 외화 지출이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죠. 새로운 사고의 전환과 국가 경제 발전에의 기여가 절실한 때였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을 지향하다
故 문태식 명예회장은 기술 확보에 성공하자 1960년 9월 아주산업을 창업했다. 나무 전봇대를 콘크리트 전봇대로 대체해 기업 보국을 이룩하겠다는 포부를 실천하는 출발점이었다. ‘아주’란 사명은 ‘세계적인 기업’을 지향한다는 미래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산업을 설립한 다음해인 1961년 서울 망우동에 원심력 콘크리트 전주 및 파일 공장을 건설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첫 공장 입지로 서울과 춘천을 잇는 2차선 도로가 있는 망우동을 선택한 결정은 탁월했다. 망우동은 서울시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로 경기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생산과 물류에 모두 적합한 입지였다. 망우동 공장은 한국전력에 납품하는 원심력 콘크리트 전봇대를 주로 생산했다. 운도 따랐다. 당시 벌거숭이산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나무마저도 땔감으로 가져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1962년 정부는 ‘산림법’을 제정했다. 무분별한 벌목을 엄하게 금지하는 한편 산림 자원 보존 방안을 마련했다. 철도용 침목을 나무에서 콘크리트 침목으로, 나무젓가락 대신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대체하는 정책과 함께 나무 전봇대를 콘크리트 전봇대로 대체하는 사업도 펼쳤다.
개척자정신으로 뻗어 나가다
아주산업의 콘크리트 전봇대에서 시작된 사업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함께 새로운 분야로 뻗어 나갔다. 1960년대 제3공화국의 전후 재건 사업과 새마을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부는 농촌 환경 개선 정책을 펼치며 저수지와 다목적 댐을 만드는 등 농지 관개 수로 건설에 역점을 두었다. 또 늘어나는 인구에 대비하기 위해 주택 건설과 도시 건설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특히 1968년에는 ‘100만 인구를 위한 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서울 강남 지역과 송파권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농지 관개 수로와 도시 개발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건자재가 다름 아닌 배수로용 콘크리트 관과 상하수도용 콘크리트 관이다. 이를 간파한 아주산업은 흄관(Hume pipe)을 또 하나의 주력 사업으로 선정하고 1964년 흄관 공장을 건설했다. 1965년에는 콘크리트 제품에 대한 KS 기준이 제정되자 이를 취득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발 빠르게 착수해 그해 7월 국내 최초로 KS 마크를 획득했다.
1980년대 초 망우동에 레미콘 공장을 지은 아주산업은 레미콘 사업에도 진출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개발도상국으로 부상하면서 곳곳에 신도시와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 레미콘 수요가 급증해 수원, 구로, 오산, 인천 등에 잇달아 레미콘 공장을 세워 레미콘 업계 ‘빅3’로 떠올랐다. 아주는 현재 건자재/전문건설, 금융, 자동차, 호텔, 부동산/자원개발 등 5개 사업 분야의 다양한 계열사를 거느리는 대한민국 발전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여전히 레미콘 등 건자재 사업 부문은 아주의 주력 사업 분야이며 매출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다.
사람으로 따지면 환갑이 다가오는 나이지만 아주는 여전히 원심력 콘크리트 전봇대 개발에서 비롯된 故 문태식 명예 회장의 ‘개척자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아주는 난관에 봉착할 때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개척자정신에 두었기 때문에 성장과 발전을 이룬 셈이다.
故 문태식 명예회장이 1960년대 말 망우동 공장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