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ON FRAGRANCE
‘향기로운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짙은 묵향으로 인품을 그리다
글. 신숙원(서강대 영문학 명예교수) / 그림. Getty images
종이 위를 스쳐간 붓의 흔적은 작가의 성정을 드러낸다.
농담(濃淡)에 따라 각기 달리 핀 꽃 한 송이도 넘치는 대지의 기운에 안달이 났는지 몸을 들썩인다. 생명이 움트고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 봄, 묵에 녹아든 인품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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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봄 향기, 꽃향기, 풀 향기, 숲 향기 등 자연과 어우러져 쓰일 때 실제 어디선가 그러한 향기가 전해지듯 친근하고 편안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러한 향기가 인간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또 다른 향을 품는다. 사람의 향기를 떠올릴 때는 자연에서 저절로 묻어나오는 내음보다 ‘묵향’처럼 묵묵히 갈고 다듬은 후에 야 비로소 향기를 발하는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한 인품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향기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면 선뜻 향긋한 봄 내음이 머리에 떠오른다. 매서운 꽃샘추위와 변덕스런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완연한 봄빛에 화려한 데뷔를 앞두고 있는 봄의 향기가 공중에서 맴돌고 있는 듯하다. 봄의 시작은 경이롭고 신비롭기 그지없다.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봄이기에 친근한 손님이라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봄은 언제나 처음 만나는 손님처럼 설렘으로 나를 채운다.
바짝 마른 앙상한 가지에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천상의 연둣빛 애기순, 부드러운 버들강아지, 봄을 알리려는 급한마음에 잎보다 먼저 피어오르는 산수유 꽃,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바람의 온기 등 봄의 전령들은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봄의 향기를 듬뿍 뿜어낸다.
‘봄의 향기’는 봄꽃과 봄나물, 그리고 봄볕을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나뭇잎과 꽃잎, 따사로운 햇볕,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대기를 통해 우리는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봄’이라는 계절의 화려한 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는 후각을 통해서보다는 시각을 통해서 더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쩌면 봄의 향기는 실제로 느껴지는 향이 아니라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발버둥치는 대지의 꿈틀거림이 자아내는 환상의 향기일지도 모른다.
메마르고 차가운 겨울을 밀쳐내고 역동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자연의 시각적인 풍경이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봄의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눈부시고 신비로운 봄 향기는 우리를 쉽게 감동시키고 취하게 만들지만 우리 마음속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자연의 향기보다 더 아름답고 우리의 마음을 오랫동안 설레게 하는 것은 인품의 향기다. 자연의 향기가 신(神)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인품의 향기는 우리가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얻을 수 있는 노력의 산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세태의 유행에 휩쓸리며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 인간으로서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범죄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고고한 인품의 향기를 지닌 사람을 만나는 일은 큰 행운과도 같다.
그러한 이와의 만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위로가 되는지.
기로운 인품을 지닌 사람에게는 진한 묵향이 느껴진다.
끝없이 갈고 닦아야 얻어지는 은은한 향기. 자신만의 독특하고 뚜렷한 정체성으로 고고한 자태를 갖춘 반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사람. 그 어떤 현실적인 이익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 인간에 대한 연민과 포용력을 지닌 사람. 공명심에 가득 차 자신을 내세우기에 앞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 합리적인 이성과 예술적 감성을 고루 갖춘 사람. 그가 하는 말보다 격조 있는 인품이 먼저 그 사람에 대해 알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향기로워질까?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인품이 높은 분들이 많이 계신다. 때로 마음이 불안정할 때 나는 그런 분들을 찾아가 만난다.
그들의 겸손하고 넉넉한 인품이 나의 불편한 마음, 내 마음속에 깃든 자만심과 욕심, 불만과 억울함, 분노와 슬픔 같은 어두운 감정을 정화시키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한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동안 지나온 삶과 나의 인품을 반추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들처럼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봄볕과 봄바람이 서로 협동해 작은 싹을 키우듯 올 봄 어느 날, 나 역시 향긋한 인품을 가진 이와의 만남을 꿈꾼다.
글 신숙원
신숙원은 영미문학자다. 문학작품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이면을 깊게 바라보며 행복한 삶에 관한 글을 쓴다.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 번역 및 저술을 하며 많은 사회봉사 활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