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015 SPRING

SCENE OF FRAGRANCE
많은 사람들의 창의력을 깨운 향기를 이야기합니다

감각을 깨우는 창의성의 연원

향기, 낯선 세상을 부화시키다

글. 조승연(세계문화전략가)

오감 중 가장 신비로운 영역은 단연 후각.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특정한 향기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그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다.
그 향기들이 마비된 감각을 깨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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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향기에 민감하다. 그들은 특히 19세기 프랑스 대표 문학가 중 한 명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달콤하고 고소한 마들렌 냄새를 고향 냄새처럼 추억에 젖어 회상하듯 떠올린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장편소설이지만 마들렌이라는 푹신푹신한 케이크 냄새에 관한 묘사가 가장 많이 회자된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날 마들렌을 허브티에 찍어 먹으며 마들렌을 먹는 순간만큼은 인생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잊고 기쁨에 빠져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고통을 알기 전의 어린 시절, 허브티로 눅눅해졌지만 여전히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마들렌의 맛을 통해 지나간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마들렌의 향기는 단순히 달콤한 빵 냄새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담긴 감정의 타임캡슐이었던 것이다. 프루스트는 책에서 “과거가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 과거의 아련하지만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가장 끈질기고 진실한 부분, 즉 향과 맛은 오랫동안 남는다”라고 마들렌 냄새를 표현했다.
향, 우리 감성의 온도계
긴 설명을 더할 필요 없이 감각적으로 사회생활을 멋지게 잘하는 사람에게 프랑스인들은 “그 사람 냄새 맡을 줄 안다(Il a du flair)”라고 표현한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 청진기가 발명되지 않아 의사들은 청진기 없이 환자들을 진찰해야 했다. 병명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환자의 분비물 냄새로 질병을 판단해 처방을 내려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전문 용어와 숫자로 표현되는 과학 지식이 발명되기 전까지의 인간들은 오감, 그중에서도 냄새 데이터로 여러 유용한 일들을 해결해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19세기 문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줄 알더라도 냄새에 둔감한 사람을 일컬어 논리는 강하지만 세상살이의 ‘감’을 잡지 못하는 센스 없는 인물로 묘사하곤 했다.
프랑스 여류작가 콜레트는 자신에게 결혼을 앞둔 장성한 아들이 있다면 와인이나 치즈, 트러플을 먹을 줄 모르는 여자는 믿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와인에서 나는 여러 오묘한 흙과 과일 향기들, 아로마나 치즈의 텁텁한 냄새, 트러플의 오묘한 향을 즐길 줄 모르는 여자는 인생을 센스, 즉 감각이 아닌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여자는 남자를 대할 때도 순수하고 낭만적인 감정보다 계산을 앞세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콜레트는 냄새에 무딘 여자를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믿지 마라. 경계하라(mefie-toi)”고 단언하듯 표현했던 것이다.
각인된 기억, 향수를 불러 일으키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대표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표현했듯 사람의 머릿속에는 안개처럼 뿌옇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성 세계의 뿌리가 들어 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했던 인상적인 일들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추억’과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사는 동안 쓱스쳐 지나가느라 기억에 분명하게 저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 감각을 자극한 찰나의 요소들이 우리 안에 들어가 때로 인생을 결정하는 무의식에 반영되곤 한다. 러시아 철학자 블라드미르잔켈레비치는 이것을 ‘향수(nostalgie)’라고 불렀다. 잔켈레비치는 우리 마음속에 희미한 흔적을 남긴 과거를 일깨워 ‘나’의 정체성과 뿌리를 확실하게 깨우쳐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향기이며 그리운 옛 모습 역시 향수의 한 단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본 만큼 성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경험한 것을 뜻한다. 그 경험을 잔켈레비치와 프루스트는 우리 머릿속에 흔적을 남겼다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흔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정한 모양일 수도 있지만, 대개 냄새로 우리 몸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모두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며, 그 원천 속에서 생각, 즉 창의성이 생긴다는 것이 두 대가의 의견이다.

제철과일의 향은 계절보다 먼저 우리의 후각을 일깨운다.

유럽의 시장에서는 입구부터 치즈 향이 가득하다.

비 오는 날, 대지에 흩뿌려진 빗방울에서 퍼지는 비 냄새는 잊고 지냈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풍요로운 세상을 여는 단 하나의 열쇠
유럽이 문학의 전성기를 이루던 19세기에는 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숲 속을 산책하며 창의성의 실마리를 찾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철학과 시, 문학과 논리를 넘나드는 여러 작품에 냄새에 관한 다양한 묘사들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중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표현을 보자. “우리는 개울가에서 ‘냄새’라는 꿈나라로 들어가는 대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곳을 산책하는 동안 맡았던 냄새는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갑자기 상상력에 발동을 건다. “모든 향기는 공기와 빛의 만남이다. 나무는 무지개를 만나면 갑자기 더 강한 향기를 품어 낸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냄새가 몸속으로 들어가 샘솟는 창의성의 원천이 되듯냄새가 우리의 마음을 현실과 논리의 세계에서 분리시키면서 감정과 희망으로만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고 말한다. 그가 향기를 ‘꿈으로 가는 대문’이라고 표현한 까닭이다. 그는 다시 “눈으로 보는 것은 자연의 드라마와 나 사이에 커튼을 친다. 하지만 희미한 향기의 흔적, 아주 작은 냄새 덕분에 내 정신과 상상 세계의 날씨가 바뀐다”라고 말했다.
사실 창의력의 원천은 현실이라는 두터운 장막 안에 두텁게 꼬여있는 실제 세계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의 다른 표현이다. 여섯 개의 멜로디가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바흐의 ‘푸가’속에서 숨겨둔 오보에의 익살맞은 장식음을 들을 줄 아는 것, 드넓은 하늘에서 한 마리의 새가 춤추는 장면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의 인생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에 비해 훨씬 풍요로울 것이다. 풍요로운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냄새라는 것을 가장 잘 이해했던 이들이 바로 19세기 유럽 문인, 철학자다. 그들은 세상을 뒤덮고 있는 냄새 속에서 기쁨, 환열, 추억, 때로는 절망과 슬픔의 감정을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코로 침투하는 독특한 향기를 수많은 ‘톤’으로 갈라내어 그들 사이의 조화와 부조화를 구분할줄 아는 능력은 짐작컨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섬세한 예술 행위일 것이다. 후각 예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와인 소믈리에다. 와인 전문가를 ‘소믈리에’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킁킁거리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코로 맡은 단 한 번의 향기를 통해 좋은 와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내는 그들을 경이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이는 소믈리에가 와인 한 잔에 담긴 미세한 차이를 느끼고 유희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즐기는 그들을 예의주시한다.

소믈리에에게 후각은 미각만큼 중요하다. 입안과 코안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후각이 미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프레스코발디 공작 가문은 옛날부터 뛰어난 와인을 생산해왔다. 이곳에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와인을 숙성시키는 공간인 성 지하실에 자주 업고 간다. 물론 어린아이가 술을 마실 수는 없지만, 함께 온 손자에게 와인을 숙성시키는 통을 만드는 여러 나무의 냄새를 맡게 하려는 것이다. 이 가문은 결국 대를 이어 뛰어난 음식, 음료, 향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예민한 후각에 있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와인 명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해온 셈이다.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라벤더 밭

향기, 낯선 세계로 통하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보면 도시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른 아침 파리의 아파트에서 밖으로 걸어 나가면, 오래된 집에서 나는 퀴퀴한 석재와 목재 냄새를 배경으로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의 오줌 냄새가 빵 굽는 향기와 함께 거리를 맴돈다. 많은 나라를 이동하며 살아본 필자는 아마 눈을 가리고 새로운 도시에 데려다 놓더라도 그곳의 냄새를 맡는 순간 서있는 곳이 어딘지 단번에 알아채며 예전 살던 시절의 기억을 금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냄새는 특정 도시, 한 사람, 한 가지 물건, 하나의 생각, 뛰어난 아이디어, 고유의 스타일을 긴 미사여구와 수식 없이 단번에 알려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지만 냄새는 때로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어보면 주인공 혼자 아무도 없는 산을 넘어가던 중 비에 젖은 자기 몸 냄새를 맡으며 당황해하는 장면이 있다. 대도시인 파리에 살며 몸에 밴 더러운 도시 냄새가 비에 씻겨 나가자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얼굴이 완전 바뀐 사람이 거울 앞에서 황당해하는 것처럼 그는 체취가 사라진 본인이 낯설어진 것이다.
감각은 향기를 깨고 나온다. 향기는 곧 세계다
서울에 사는 우리는 냄새의 중요성을 대부분 잊고 산다. 한꺼번에 수천 가지의 냄새가 우리의 코를 한꺼번에 찔러 오히려 냄새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숨을 참게 되듯, 냄새의 홍수에 빠져 사는 동안 오히려 대부분의 냄새를 무시하게 되면서 우리의 후각은 점점 둔감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동물의 생존을 지켜주는 중요한 본능적 감각은 역시 생명체의 냄새를 맡는 것이다.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행태, 즉 먹고 사랑하는 것은 주로 냄새를 통해 해결되었다. 맹수는 먹잇감이 스쳐 지나간 땅 냄새를 탐지해서 자기가 원하는 사냥감을 쫓고, 모든 암컷과 수컷은 서로의 페로몬 향기로 짝짓기 상대를 결정해 번식을 한다.
꽃들은 아름다운 냄새로 벌과 나비를 끌어들여, 암술과 수술이 서로 사랑을 나누도록 유인한 후 열매를 맺어 역시 후손을 번식시켜 자연을 유지시킨다.

달큰한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던 꽃은 어느새 플로랄 계열 향수가 되어 우리 삶을 향기롭게 해주고 있다.

냄새의 홍수에 빠진 인간에게는 어떤 향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 문득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창의성의 원천이 되어 준다. 이탈리아 단어 ‘sentire’와 프랑스 단어 ‘sentir’는 ‘느끼다’와 ‘냄새 맡는다’를 동시에 뜻하는 이유다. 우리가 도시의 악취에 마비되어 잃어버린 후각을 다시 열게 되면 아마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한 대로 세상을 ‘나무 꼭대기에 빛의 원천이 있고, 그 잎사귀가 불타는 것처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면 속 솟아나는 창의력의 샘물을 만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잠긴 후각을 열어보자.

글 조승연

조승연은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가 능통하고 독일어, 라틴어는 독해가 가능하다. 현재 ‘오리진보카’ 대표로, 세계에 수출할 영어어휘학습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공부기술』, 『그물망 공부법』등 총 16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