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 OF FRAGRANCE
향기를 통해 우리 삶의 재미를 들여다봅니다
삶의 부피를 줄이고 가치를 높이는
당신의 취향
글. 임원철(조향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을 즐기는 일은 늘 특별하다. 향의 강약과 무게에 따라 타인을 정의하기도 하고 낯선 향을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기도 한다. 당신 주변을 떠다니는 공기를 한 주먹 쥔 후 손바닥을 펼쳐 향기를 맡아보자. 지금 맡고 있는 향을 알려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군지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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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이 말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 같다고. 한 번의 분사로 행복을 퍼뜨리듯 하나의 향으로 각양각색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조향사인 필자가 매일 매진하는 일이다. 필자의 직업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비록 지금의 조향사와 같은 개념의 직업은 아니었지만 조선 성종 때 향을 관리하는 ‘전향별감’이라는 벼슬이 있었다. 또한 궁궐마다 향실도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향실에 있는 두 명의 향장들이 요즘의 조향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제를 올릴 때 피우는 향을 만들거나 관리하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15세기면 향수 강국인 프랑스에 조향사란 직업이 이탈리아로부터 처음으로 전해졌었던 16세기보다도 앞선 일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 혹은 그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유구하고 화려한 향 문화를 꽃피운 서양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향 문화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서양은 오랜 세월 동안 방대한 양의 향 이야기를 축적해왔다.
향기, 피어오르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의 향수 역사는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시대에 만들어진 신전 벽에는 상형문자로 향수 처방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과 유사한 방식으로 향을 조합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한 향료들도 유향이나 민트, 소나무 향, 마스틱 향료와 같이 현재에도 사용되는 것들이라서 더욱 놀랍다. 그러나 이미 기원전 2,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탭푸티’라는 여인이 꽃이나 창포에서 향을 얻었다는 것 역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현재 우리가 에탄올에 희석해 사용하는 향수는 이집트 기록 이후 한참을 지나 1709년 독일 쾰른 지역에서 발명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조향사가 에탄올에 오렌지, 레몬 같은 상큼한 향들과 비터 오렌지 나무에서 얻은 오렌지 블라썸 향료 등을 넣어서 만든 오 드 코롱(Eau de Cologne)이라는 상큼한 향수였다.
향수의 메카를 자처하는 프랑스 사람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향수 문화가 제일 먼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은 파리가 아니라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이었다.
프랑스로 향수 문화를 전해준 인물이 1533년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한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때 조향사가 카트린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오면서 프랑스 향수 산업에 불을 지폈다.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건너온 향기는 프랑스 사교 문화가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피어오른 17세기 루이 14세를 기점으로 부흥했다.
프랑스는 19세기 초 샤넬 No.5의 등장으로 향수의 메카 프랑스로서의 확고부동한 지위를 획득했다. 이전까지는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향수가 에탄올의 발견, 천연향료를 대체하고 향수 가격을 낮출 수 있었던 저렴한 합성향료의 발견, 마지막으로 샤넬이라는 걸출한 패션 디자이너의 애정으로 인해 향수가 패션과 동등한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마치 옷을 입듯 자연스럽게 대중들이 향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공간을 디자인하는 향기 인테리어
최근 들어 유럽의 이처럼 길고 화려한 향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한 듯 국내 향수 시장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 서구의 향과 향수 문화를 꾸준히 답습하기만 하던 기존 습관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만의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변화가 말이다. 국내 향수 시장의 양상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방향제와 향수가 결합한 형태로 고급스러운 방향제를 뜻하는 홈 퍼퓸 시장이 향수를 앞질러 큰 성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여유가 생기고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사람들의 관심과 트렌드가 의식주 순서로 확장되어 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사는 공간을 좀 더 편하고 여유로운 장소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친다. 이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면 신과 인간 중심의 서구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친화적인 우리나라의 문화를 원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보다 주변을 더 많이 사고하고 배려하는 동양 문화 말이다. 그래서인지 조향사인 필자 역시 캔들이나 디퓨저, 패브릭 미스트와 같은 홈 퍼퓸 제품들에 쓰이는 향에 좀 더 애착을 갖고 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나에게만 맞추면 되는 향수와 달리 이런 제품들의 향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향으로 완성한 예술
두 번째 경향은 조향사들만의 고유 영역이었던 향 만들기에 직접 참여하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DIY(Do It Yourself)라고 해서 ‘스스로 만들기’가 이미 다양한 분야에 퍼져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다. 하지만 수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여러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조향의 세계까지도 이제는 소비자들로부터 개방을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무리한 요구라고 볼 수도 없다. 향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향의 세계가 특정한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향은 향을 맡는 순간의 경험과 감정의 변화와 함께 뇌에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 추억으로 영원히 각인된다.
우리들이 향을 느끼는 순간 향 성분들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추억만 남게 된다. 바로 그 추억이 사람의 영혼과도 같은 향의 본질이라면 그 영혼은 조향사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조향사는 향을 이용해 영혼을 담을 그릇을 만들 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소비자들의 몫이다. 결국 조향의 마지막 단계는 향을 사랑하는 이들이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향기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이미 다양한 향수 브랜드에서 이러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욕구를 감지하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갈리마드(Galimard)라는 프랑스에서도 향수로 유명한 도시인 그라스에서 1747년에 설립된 향수 회사다. 우리나라에도 진출해 있는 갈리마드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향수를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다.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향료들을 소비자들이 직접 선정하게 하고 이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병에 담으면 주인의 취향으로 만든 향수가 완성된다. 그야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향수인 셈이다.
향수의 기원은 꽃에서 추출한 천연향료였다. 이후 향료에 들어가는 꽃의 양에 비해 천연향료가 너무 적게 추출되자 석탄추출물인 콜타르로부터 추출한 합성향료를 이용했다.
세상에 없던 향을 만들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방법은 향수 레이어링이다. 주로 패션 아이템을 착용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 레이어링은 향수에서도 적용된다. 디자이너 샤넬이 그러했듯 일종의 자기표현 방식인 향수 역시 레이어링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창조할 수 있다. 향수 레이어링은 하나의 향수를 뿌리고 그 위에 다른 향수를 뿌려서 두 향기가 섞이면서 전혀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향수 공방과 비슷한 개념이긴 하지만 향 레이어링의 경우 오로지 사용하면서 테스트가 가능하다. 직접 실험하고 개발하는 동안 드는 비용도 무시할 수는 없다. 조금씩 섬세하게 향취를 수정해가며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조향과 달리 레이어링의 경우 섬세하게 조절할 수 없다는 제한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무궁무진한 향 레이어링의 세계는 색다르고 남다른 향을 찾아나서는 이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의 욕구를 예측하고 발굴해내는 촉을 가진 브랜드들이 있다. 요즘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조 말론(Jo Malone)이 바로 그렇다. 1990년 영국에서 조향사 조 말론이 설립한 화장품 브랜드다. 그녀는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살에 남편을 만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향수를 주력제품으로 밀고 있는 조 말론은 설립 초기부터 이미 레이어링을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고수해오고 있다.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아도 향수 조합에 대해서 다양한 제안들을 올려놓고 있을 정도다.
소설 『향수』의 “향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것이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많은 이들이 향으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공간을 향기롭게 가꾸는 데 애정을 쏟고 있다.
천 겹의 잎사귀를 쌓아올리듯
향수 레이어링은 물감을 섞는 것과 비슷하다.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색이 어두워져 결국 검은색이 되고 만다. 향도 그렇다. 향을 많이 겹쳐 뿌릴 경우 무겁고 짙어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무겁지 않은 향으로 선정하여 3개 이하로 레이어링하는 것이 좋다.
또한 최대한 겹치지 않는 향을 가진 향수들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 비슷한 향기를 가진 향수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레이어링했을 때 나만의 향기, 개성 넘치는 향기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장미향과 장미향을 레이어링하면 결국 장미향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린노트인 녹색의 풀잎 향과 장미 향을 레이어링하면 마치 신선한 녹색 잎이 무성하게 달린 장미꽃과 같은 장미 향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릴 때 반드시 겹쳐서 분사할 필요는 없다.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닌 향수를 각각 왼쪽 손목과 오른쪽 손목에 뿌리는 것처럼 다른 부위에 각각 다른 향수를 뿌려줌으로써 나에게서 두 가지 다른 이미지가 번갈아 나타나게끔 할 수도 있다. 요즘 인기 드라마속 다중인격장애 주인공처럼 말이다.
서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의 향료 관련 문화는 오래되지도 화려하지도 않거니와 향수를 사용한 역사는 더욱 짧기만 하다. 그러나 서구의 그 광활한 역사를 짧게 압축하려는 듯 현재 국내에서 향을 즐기는 이들이 빠르게 만들어내는 향 문화가 흥미진진하다. 향과 향수를 향유하는 이들은 그저 다양한 향을 마음껏 누리면 되는 것이고, 조향사는 향을 사랑하는 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면 되는 것이리라.
글 임원철
임원철은 글 쓰는 조향사다. TED 강의를 통해 ‘모든 것이 사라져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 향기’를 발표했다. 저서로는 『당신의 향수, 찾으
셨나요?』, 『향수 그리고 향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