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 OF LIFE
집이 주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즐거운 우리 집
행복이 배가 되는 창평 양진제
글. 박신혜 / 사진. 안홍범
즐거움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무색한 요즘이다.
오죽하면 나눈 슬픔은 약점이 되고 즐거움은 질투가 된다는 말이 있을까.
이 인색한 농담도 오랜 시간 묵힌 장맛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삼대가 함께 살아 더욱 봄 향기 그윽한 창평 고씨 양진제 종가를 찾아가 본다.
화면을 터치하면 닫힙니다
오늘날 분업화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서, 기업에서, 가까이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빠르고 명쾌한 관리를 위해 분업만큼 편리한 방법이 있을까마는 철저히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인간 소외 현상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화목한 분업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다. 담양 창평 고씨 양진제 종가에서 담그는 장맛이 바로 그러하다. 장흥과 무안에서 무럭무럭 자란 콩과 담양 대나무 안에서 구운 서해안 천일염이 150m 암반수와 어우러지면 깊고 그윽한 맛의 재료가 한데 모인다. 전라도의 햇볕과 담양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맑은 시골 공기에 오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제야 맛 좋은 장 한 종지가 완성된다.
볕이 높게 뜬 하룻날, 깊고 건강한 장맛을 찾아 나섰다. 아시아 최초 슬로우 시티로 선정된 삼지내마을의 고즈넉한 돌담을 동무 삼아 구불구불한 길 끝에 하늘높이 뻗은 홍송이 장엄하게 지키고 있는 작은 분지가 숨어있다.
움푹 팬 분지 중앙에 풍만한 달항아리 모양의 전라도 옹기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곳의 장맛이 일품이려니 짐작이 가능하다. 발효실이며 살림집, 오두막 등 동서남북 사방에서 옹기를 감싸안고 있는 형태의 종갓집은 말린 시래기를 거둬들일틈도 없이 바쁘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살림집의 방풍벽이 보인다. 간결한 서체로 새겨진 복(福)자에는 마주한 수천 개의 항아리에 복들이 빠짐없이 들어앉기를 간절히 바라는 종손의 마음이 담겨있다.
기순도 노종부가 딸 고민견 씨와 발효 중인 메주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쁘더라도 이곳에서 쉬어가세요
종가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청량한 풍경소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선 객을 맞이하는 건 360년 전 각박한 세상에서 인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를 담은 집안 어르신의 분재기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가문을 지키는 조상의 가르침이 아로새겨진 한옥의 안주인은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인 기순도 명인이다.
다과상에는 당근전과, 도라지전과, 약과 등 달콤한 주전부리와 식혜가 소담스럽게 객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잠든 새벽 고요히 일어나 정성스럽게 준비한 노종부의 솜씨다.
예부터 창평 쌀엿은 입에 붙지 않은 엿으로 임금에게 진상해온 귀한 식품이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고 오직 엿기름으로만 맛을 낸 노종부의 식혜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단맛은 입안을 한 번 맴돌더니 금세 사라졌다. 이 기분 좋은 단맛에 반한 이는 본인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 마시던 바로 그 맛이라며 감동한 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노종부는 설탕 대신 감초로 맛을 낸명인표 식혜를 담갔다. 학교를 마치고 귀가한 손자들도 집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바로 이 식혜다.
끼니 때가 되어 허기가 도는지 손자들은 할머니 주변으로 몰려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이 어서 빨리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마치 아기새가 어미새 쪽으로 벙긋벙긋거리는 모양과 닮았다.
명인의 손끝에서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밥상에는 풍성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직접 기른 콩나물로 무침을 하고 간장 바른 김을 말려 곱게 튀긴 부각, 젓갈이 아닌 간장으로 김장한 김치가 고재 탁자를 빈 곳 없이 채웠다. 밥 한 숟갈마다 영양 가득한 봄이 입안으로 밀려든다.
종손인 경모가 할머니, 고모와 함께 약과 만들기에 한창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과는 찾아오는 손님들의 주전부리가 된다.
가족이 함께 정성으로 채우는 달항아리
속이 든든해지니 그제야 집과 마주하고 있는 홍송과 신우대가 꼿꼿하게 선 넉넉한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과거 단풍나무, 은행나무, 감나무 등 숲이 우거졌던 이곳에는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장독들이 자리를 잡았다.
장을 가를 때 바람에 날려 자연스럽게 들어앉는 송화가루가 감칠맛을 더하는 종가는 안팎 할 것 없이 어디나 꽃밭이다. 이는 모두 명인의 자녀인 종손 고훈국, 고민견 남매의 솜씨다.
창을 뚫고 들어온 볕에 벌써 봄인 줄 알고 서둘러 핀자스민과 천궁 향이 어우러져 집 안을 채웠다. 아직 더딘 봄을 재촉하듯 바깥에서도 볕을 양분삼아 싹을 틔우려는 초록들의 고군분투가 한창이다. 잔디의 새순이 파릇파릇 오르려는 정원 한 켠에는 대나무 관을 통해 깨끗한 물을 공급 받는 작은 호수가 다소곳 자리 잡고 있다. 조만간 이곳에 화려한 연꽃이 피고 울타리를 따라 장미가 수줍게 고개를 들 것이다. 아이들은 가지 끝에 올망졸망 열린 블루베리와 앵두를 고사리 손으로 떼어 입 안 가득 채워 넣고 어른들은 철에 맞춰 피어오르는 꽃과 자라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테다.
모자람 없는 사계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장본인인 남매가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도와 장 담그는 일을 시작 할 때 집안 어르신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한창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을 시골 마을에 잡아두어도 괜찮겠냐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애초 성정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면 남매 역시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감나무 밭에 주렁주렁 열린 감을 따서 시골 장터에 팔던 두 사람은 학창 시절,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각자의 친구들을 데려와 집안일을 거들었다.
최근 어머니는 문중의 보배라는 찬사와 함께 고씨 가문 송공패를 받았다. 문중에서 여성이 받기는 어려운 명인의 송공패에는 가족의 헌신이 담겨있었다. 어찌보면 종손 고훈국 씨가 11대 종부인 이윤영 씨와 결혼할 때 자신과 결혼하면 많은 선물이 따라온다며 떨었던 너스레가 거짓말이 아닌 셈이다.
종부의 길을 택한 며느리를 위해 노종부는 상을 간소화하는 등 넘치는 종가의 일을 덜어주었다. 본인은 종부가 된 후 명절상, 제사상, 잔치상, 생일상, 묘사상 등 일 년에 서른세 번 차리는 상이었다. 그동안 이렇게 많은 상을 차려왔다는 것도 2008년 장류로 한국전통식품 명인 제35호로 지정됐을 때 세어본 것. 노종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려니 하고 묵묵히 살았다.
흠이 나 사용하지 못하게 된 작은 옹기는 다육식물의 화분이 되어 할머니와 손자들의 훌륭한 놀잇감이 된다.
장맛의 연금술
가족은 흐르는 세월에 아랑곳 않고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근다. 직접 띄운 메주를 하나하나 매달아 발효시킨 후 가마에 구운 죽염과 황토지장수로 묵힌 장맛에 담긴 정성은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첫해 50가마의 콩으로 시작했던 일이 어느새 2천 3백 가마로 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 방식에만 머물러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죽염에 든 숯 성분으로 부담스런 청국장 냄새를 날린 후 먹기 편하게 분말이나 환의 형태로 판매하거나 또 다른 창평의 명물, 딸기와 함께 딸기고추장을 만드는 등 장맛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발효가 안 돼도 문제고 너무 되어 맛이 짜거나 써도 못쓰는 장맛은 한 끗 차이로 결정된다. 입맛 돋우는 장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눈팔지 말고 쉼 없이 장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이유다. 종가의 정성을 자연도 알았는지 분지에 내리쬐는 햇빛,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과 그늘, 오랜 세월 종갓집에서 자라난 좋은 균들 모두 퐁퐁 솟아나 익어가는 장을 독려한다.
정성으로 장을 담그고 익은 장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낌없이 나누니 노종부가 시집온 지 마흔네 해가 훌쩍지났다. 심혈을 기울여 장을 담그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 인생이 고소하게 익어있었다. 갓 5개월 된 막내손자 입에 들어간 쌀알 하나에 집 안 가득 삼대의 웃음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자연스레 고택의 풍경이 된다.
종가 식구들이 푸짐한 밥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점심을 함께 나누고 있다. 손자들 재롱에 식사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글 박신혜
박신혜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매체에 자신만의 콘텐츠를 담아내고자 하는 에디터다.